[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이시대 『마지막 선비』

  • 입력 1997년 10월 21일 08시 19분


서울 성북동 삼선교쪽에서 성북동길로 오르는 오른쪽 초입엔 「간송미술관」이 있다. 일제시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선생이 민족문화재의 일본 유출을 막으려는 신념 하나로 평생을 바쳐 수집했던 우리 문화유산을 모아둔 보고(寶庫). 간송선생의 민족혼이 살아숨쉬는, 그런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 들어서면 간송보다도 「최완수(崔完秀)」란 이름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인 까닭일까. 30년 넘게 간송미술관과 맺어온 인연.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결혼까지 저버린 채 학문과 문화유산에 매달려온 그의 「결벽」에 가까운 고집 때문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이 시대 마지막 선비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선비라니, 무슨 말씀을. 좀 흔치 않을 뿐이고, 굳이 말하자면 새로운 선비의 시작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미술사학자. 올해 쉰다섯. 고교시절 이미 수준급의 한학을 구사했던, 「그래서 국립서울대 사학과가 하도 시시해 배울만한게 없었던」 당돌하고도 자신만만했던 청년. 그 20대, 대체 무엇이 그를 간송미술관에 빠져들게 했던가. 『66년이니까 스물다섯이었죠. 대학 졸업하고 경주 공주 부여박물관을 거쳐 중앙박물관에 있을 때 최순우(崔淳雨·전국립중앙박물관장)선생님께서 간송미술관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정말 공부할 분위기가 될까 걱정이 앞섰죠. 간섭만 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간송선생의 아들이자 간송미술관장인 전영우(全暎雨·상명대교수)씨를 먼저 만났죠. 괜찮아 보이더군요. 공부할 분위기도 만들어줄 것 같았고. 그날 대낮부터 새벽까지 함께 술을 마시며 일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곤 간송미술관을 다시 찾은 다음날. 무언가 그의 발목을 휘어잡는 것이 있었다. 바로 불교사연구의 필독서인 「대정신수대장경」. 『대학 시절, 도서관엔 한질밖에 없어서 마음놓고 공부할 수 없었는데 간송에 대장경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니, 이것만으로도 간송미술관에 머무를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간송」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들어가자마자 15년 넘게 내팽개쳐 있던 고서적 정리에 꼬박 1년을 바쳤다. 하루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면 마치 탄광 막장을 나서는 광원 같은 기분이었다. 그 결실로 「간송문고 한적(漢籍)목록」을 냈고 곧이어 서화 도자기 정리에 들어가 71년 드디어 첫 전시회로 「겸재 정선(謙齋 鄭)서화전시회」를 열었다. 간송미술관과 최실장 모두에게 새로운 출발이었다. 그는 자신의 해박한 한학실력과 미술품을 보는 안목을 바탕으로 서서히 미술사학자의 독보적 경지를 열어나갔다. 이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와 겸재 정선에 매달려 70,80년대의 20여년을 다 바쳤다. 왜 추사이고 겸재인가. 이는 일제가 부정적으로 왜곡해 놓은 조선의 문화를 바로잡으려는 의지에서 비롯됐다. 『한민족을 완벽하게 통일한 나라는 바로 조선뿐이었습니다. 성리학이라는 하나의 이념으로 5백년을 이끌어온 나라도 역시 세계에서 조선 하나뿐입니다. 조선은 우리 문화 역량의 총합체인 셈이죠』 정옥자(鄭玉子) 이태진(李泰鎭)서울대교수는 대학시절 「조선후기문화를 보는 새로운 눈」을 갖기 위해 의기투합했던 동기생들이다. 『조선을 긍정적으로 보는 데는 추사가 최고입니다. 추사의 힘은 조선 문화역량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중국 것이 아닌, 우리의 주체적인 사실문화를 보여줬던 정선의 「진경(眞景)산수화」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죠』 그의 학문세계는 「김추사연구초」 「불상연구」 「명찰순례」 등에 잘 스며있고 특히 93년 펴낸 역저 「겸재정선 진경산수화」를 통해 조선후기를 「진경시대」라 명명한 바 있다. 이 「진경」이야말로 조선후기문화의 당당한 자유혼이었던 것이다. 몇년이면 미술사에 대한 눈이 뜨이는지 우문(愚問)을 던졌다. 『감식안도 중요하지만 작품의 배경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미술사는 불가능합니다. 배경 지식이 풍부하면 본듯이 엮어낼 수 있으니까요』 그의 배경지식은 한학의 힘에 있다. 충남 예산에서 서울로 유학온 그는 경복고 시절, 한학과 보학의 대가였던 백아 김창현(白牙 金彰顯)선생을 만나 한학의 깊이에 하염없이 빠져들었다. 조선사대부의 한문과 문화를 모두 섭렵했을 정도니 서울대 사학과의 한학수준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이제 그는 조선시대 충의열전에 손을 대고 있다. 한 80여명. 『광복 반세기가 흘렀건만 조선의 제대로 된 열전 하나 없는 현실에 대한 반성의 뜻』이라고 말한다. 이 현란한 시대, 흔들림 없이 외길을 걷고 있는 최실장. 그는 일요일인 19일에도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간송미술관에 나와 그림을 매만지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광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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