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의 문」 <이윤기 지음/열린책들 펴냄>
싸구려 옷을 사면 단추부터 다시 달아야 한다. 단추 흉내만 내면서 부실하게 달려있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도움이 안되는 소설을 굳이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문장이나 허망한 수식어를 다시 걸러내야 한다. 이윤기의 소설은 그런 불편함이 없도록 처음부터 야무지게 단추가 달려 있는 옷이다.
더군다나 이윤기는 합성섬유로는 옷을 만들지 않는다. 그는 올이 곧은 삼베나 깔끔한 순면, 부드러운 비단같은 천만 사용한다. 그런 천연섬유를 짜는 실은 물 같은 위안이나 불 같은 이별, 공기 같은 어둠, 흙 같은 죽음이다. 조로한 희망이나 인위적인 허무는 실 축에도 못 낀다.
「하늘의 문」은 이처럼 삶의 씨앗이나 성분, 굴대를 문제 삼는 이윤기를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추」를 포함하여 1백50여권에 이르는 책을 소개한 번역가(飜譯家)가 아니라 「변역가(變易家)」로 자리매김해 준 소설이다. 그에게 소설은 「나남의 삶에 간섭하면서 끊임없이 그 삶을 변화시켜 가는 과정」에 다름아닌 까닭이다. 그래서 누구는 이 소설에서 종교적인 신성함을 읽고 간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인간을 통해 신을 알게 하지 않고, 신을 통해 인간을 알게 한다. 사람이 곧 하늘이고, 세상이 곧 교회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윤기는 신앙 간증기가 아닌 영혼의 편력기를 쓴 것이다.
다른 누구는 이 소설에서 지독하게 진한 사랑의 향내를 맡고 간다. 이 소설 속의 사랑은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해 무균질과 진공상태에 두는 통조림이 아니다. 오히려 연민이나 고통이라는 「애압(愛壓)」으로 누르면 누를수록 맛이 나는 된장이나 고추장에 가깝다. 세월이 오히려 소금이나 숯처럼 그 위에 뿌려져 있다.
또 다른 누구는 이 소설에서 인문학적 교양을 터득해 간다. 고전이나 철학에 대한 천착과 문화적 상징에 대한 새로운 이해, 수준 높은 에피그램들의 여운으로 상사병을 앓게 하는 것이 이 소설이다. 이런 울림이 작가가 지닌 「지식」이 아니라 「지혜」에서 오는 것임은 물론이다.
이윤기에게는 이런 삶의 무늬들이 「인간」에 도달하기 위한 야곱의 사다리이다. 이윤기라는 거인에 기대면 나 같은 난쟁이도 거인 비슷하게는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사다리가 하늘에 닿기도 전에 너무 일찍 치워진 것은 아닌가 불안해 한다.
김미현(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