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회장에 취임하고 나니 막막하기만 했다. 세계경제는 저성장의 기미가 보이고 국내 경제는 3저 호황뒤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데도 삼성 내부는 긴장감이 없었다. …92년 여름부터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 전체가 사그라들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해외에서 사장단회의를 잇따라 가진 끝에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는 삼성의 신경영 선언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그룹총수들은 어떤 시각으로 세상과 시대를 읽고 있으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경영상의 결단을 내리도록 이끄는 걸까.
「21세기 앞에서」란 제목으로 지난 4월부터 9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됐던 삼성그룹 이건희회장의 에세이 모음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동아일보사발행)는 일반인이 갖고 있는 이런 궁금증들을 풀어준다.
평소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이회장이 자동차와 반도체사업에 진출하게 된 배경 등 세간의 화제를 불렀던 「결단」의 뒷얘기들을 밝히고 있다. 고교동창인 홍사덕 정무1장관, 작가 박경리씨, 이어령 이화여대석학교수 등 국내외 명사와 이회장간의 만남에 얽힌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큰 파문을 일으켰던 베이징발언에 대해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않고 손가락만 쳐다보는 현실에 실망이 컸다고 털어놓는다.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출이 정경유착이나 개인적 취미의 소산에서 비롯됐다는 세평에 대해서는 실망감마저 들었다고 토로한다.
물질문명의 아톰사회에서 정보문명의 비트사회로, 우물파는 법을 배우는 노하우에서 좋은 우물이 어디 있는지를 아는 노훼어(Know―where)로, 소비자에서 고객으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소유가치에서 사용가치로, 블루 칼라에서 화이트 칼라를 거쳐 골드 칼라로…. 저자는 21세기의 진입에 따른 경영환경의 일대변혁과 패러다임의 변화를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설명해낸다.
〈김세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