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迷路끝에서 발견한 한줄기 빛 「보르헤스」

▼「보르헤스 전집」 떠돌이 책장수가 늙은 사서를 방문해 「특별한」 책을 건넨다. 해독불가능한 문자들, 조잡한 인쇄, 닳고닳은 책장…. 언뜻 보아 싸구려 고서일 뿐이다. 심드렁한 사서에게 책장수는 마지막 페이지를 펴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서는 결코 마지막 페이지를 펼칠 수 없다. 손아귀 안에서 책의 페이지가 계속 불어났기 때문이다. 『이 책은 「모래의 책」이요. 책도 모래도 처음과 끝이 없으니까…』 악마에게 영혼을 팔듯 「모래의 책」을 산 사서는 그날부터 책의 수인(囚人)이 된다. 손에 들어온 보물을 잃을까봐 집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무한대로 불어나는 책의 내용을 살피느라 잠조차 잊는다. 자신의 현실이 책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깨달은 사서는 책을 없애버리려 하지만 무한한 책을 태우는데 무한한 시간이 걸릴까봐 불길에 던질 수도 없다. 마침내 늙은 사서는 「모래의 책」을 자신의 옛직장인 90만권의 책이 소장된 국립도서관 서가에 버리고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가 쓴 「모래의 책」. 사서를 사로잡았던 무한의 책처럼 그의 소설들은 독자를 미로에 빠뜨린다. 그 미로는 시작과 끝, 안과 밖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같아 누구도 출구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 미로를 헤매며 「책읽기란 이렇게 목적지 없는 여행을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상상력은 우주처럼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90년대 후반 한국지성계에 하나의 「유행기호」처럼 떠오른 보르헤스. 민음사가 94년부터 발간해온 보르헤스 소설집이 5권으로 완간됐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픽션들」 「알렙」 「칼잡이들의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기억」. 단 한 권의 장편소설도 쓰지 않은 보르헤스의 단편소설을 한데 모은 것이다. 유전적인 이유로 30대 후반부터 시력을 서서히 잃기 시작해 마지막 30여년간은 어둠 속에 살았던 보르헤스. 그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를 잃은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적인 세계」를 통찰하는 상상력을 얻었다. 『나는 현실은 일상적인 것이고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이 오류라고 생각한다. 지구가 생긴 이래 정열과 관념과 추측들은 일상적인 것만큼이나 현실적이었고 늘 일상적인 것들까지 만들어내곤 했다』(68년 인터뷰 중). 그의 철학과 탐정소설, 거짓역사와 사실(史實)을 교묘하게 직조한 작품들은 기호학 해체주의 환상적사실주의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하이퍼텍스트 등 20세기 지성사를 지배해온 패러다임의 시원이 되었다. 『신은 내게 책들과 밤을 동시에 주었다』고 스스로 읊었던 대로 그는 생애 대부분을 도서관 사서로 살았으며 이미 책을 읽을 수 없게 된 55세에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스페인어와 영어를 모국어로 썼고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에도 해박했다. 민음사는 보르헤스가 남긴 시와 에세이, 보르헤스 평전을 후속발간할 계획이다. 〈정은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