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길]전통문화 전문출판 「藝耕」한병화사장

  • 입력 1997년 12월 13일 08시 15분


『단 백명의 독자라해도 좋습니다. 지식에 대한 그들의 절실한 목마름을 누군가 채워줘야 하지 않겠어요』 국보, 한국미술 5천년, 한국복식(服飾)도감, 한국의 민화, 석굴암, 탱화 등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20년 가까이 정리해 펴내온 전문출판사 예경(藝耕). 한병화(韓秉化·54)사장은 「전통의 미」를 출판해온 외길 인생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젊은 시절 무한한 열정으로 만들었던 대표작으로 전국 박물관 도서관마다 소중히 꽃혀 있는 책이 「국보」 12권. 5년여의 준비와 3년에 걸친 출판으로 어렵게 세상에 나왔으나 재고는 쌓였고 빚 갚을 날은 돌아왔다. 그러나 운이 따랐다. 미처 완간도 안된 책을 일본의 다케쇼보(竹書房)출판사가 판권을 사 준 덕택에 부도위기를 넘기며 완간을 했다. 언젠가 베스트셀러라는 「한 탕」을 하기 위해 모진 세월을 기다린다는 뜻에서 도박에 비유되는 출판. 그렇지만 그는 약간은 다른 생각을 한다. 『출판인은 부지런히 문화의 씨를 뿌리는 경작자일 뿐입니다』 뿌린대로 거둘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름도 「예경(藝耕)」이다. 한국사를 전공한 그가 문화유산 정리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민과 삶의 의미에 대한 고뇌를 하던 대학시절, 78일간의 산사(山寺)방랑에서 비롯된다. 허리 높이의 눈길을 헤치고 찾은 오대산 월정사. 소담하게 눈을 이고 뻗어내린 종각의 추녀 끝, 고운 선은 영혼을 뒤흔들 만큼 아름다웠다. 졸업후 브리태니커에 입사해 세일즈맨으로 비즈니스 세계를 경험했다. 지금도 사무실 한 쪽에는 그때 받은 「이달의 세계 1위 세일즈 맨」 기념패가 있다. 말주변이 좋지는 않지만 성실하게 뛴 결과였다. 공무원 월급이 3만원 하던 때 보너스로 3백만원을 받아 번듯한 집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국의 미를 기록하고 전하는 일에 대한 간절한 희망은 결국 그를 3년만에 출판의 세계로 끌어당겼다. 『돈 벌고 싶다는 유혹에 흔들린 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출판을 해오면서 펴낸 책이 「뜻밖에」 팔리면 불쑥 돈 욕심이 생겼다. 젊고 유능한 편집부원이 대우가 조금 좋다고 다른 곳으로 떠날 때에는 더욱 그런 유혹이 왔다. 손쉽게 팔리는 책을 내서 돈을 마련해 번듯한 사무실에 직원들 보수도 많이 주고 싶다는 달콤한 생각들. 그렇지만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아 추스르며 동료나 마찬가지인 편집부원들에게 이렇게 강조해왔다. 『능력이 초라해서 여러분이 보잘 것 없는 월급으로 이 고생을 한다고는 생각지 말자. 이 길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다. 비록 지사(志士)는 아니지만 결국 누군가 가야 할 길이기에 우리가 걷고 있는 것일 뿐이다』 몇년동안 모은 돈을 쏟아부어 한국의 문화유산을 정리해 펴내도 국내에선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 일본의 출판사가 소문을 듣고 연락해올 때가 많다고 한다. 그럴때마다 「출판대국(大國)일본」을 실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점차 세계 시장에 눈을 뜨게 되었다. 『소중한 우리 문화 유산을 외국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한국의 금동불상에 대한 책을 준비중이다. 원고는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은 영국의 대학교수가 집필하고 있다고 한다. 외국의 필진을 직접 동원하지 않으면 국제출판시장에 진출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한 권의 책을 위해 집을 줄이고 모아두었던 그림을 한 점씩 내다 팔아온 인생. 그렇지만 구김살 대신 자기만의 세계를 지켜온 자부심이 충만하다. 〈조헌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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