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나 친정 등과 「합가(合家)」하는 집도 늘고 있다. 직장인들이 일찍 귀가해 「아버지가 없는 저녁」에서 「아버지가 있는 저녁」으로 집안 풍경이 바뀌고 있다.
「가족비상경제회의」를 열어 경제난을 헤쳐나갈 지혜를 모으는 움직임도 번지고 있다.》
증권회사에 다니는 박모씨(32·여)는 최근 위로 어깨동갑인 남편과의 별거생활을 그만뒀다. 박씨는 근무지를 옮기는 문제로 남편과 다투고 난 뒤 네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언니집으로 갔었다. 그는 최근 회사에서 『구조조정이 시작되면 여직원부터 잘린다』는 말이 돌면서 혼자 사는 것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박씨는 『남편도 같은 위기의식을 갖고 있어 서로 힘을 합치는 것이 살 길이라는데 공감했다』고 말했다.
별거생활을 하던 김모씨(38·식당경영)도 최근 아내(36)와 다시 합쳤다. 김씨 부부는 늘 시답지 않은 일로 다투다 지난 9월 대판 싸운 뒤 별거에 들어갔다. 김씨는 아내에게 전화로 『불경기로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들어와 달라』고 항복했고 아내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서울 여의도의 가정법률상담소에는 이혼 및 부부갈등 상담건수가 크게 줄었다. 95년에는 하루평균 1백30건에 이르렀으나 불황이 본격화된 지난해에는 80여건으로 줄었다가 최근엔 하루 30여건으로 뚝 떨어진 것.
고려대 안호용교수(사회학)는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도 불경기가 닥치면 이혼이 준다』면서 『위자료 변호사비 등 「이혼비용」과 혼자 살 때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선뜻 이혼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인은 정이 많아 배우자가 힘들 때 자신의 주장을 못내세우는 특성이 있어 외국의 경우보다 이혼이 더 줄어들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일부 전업주부의 경우 자아실현을 못하는 자신에 대해 회의하면서 상실감을 겪어왔으나 불경기로 취업이나 사회활동 등이 더욱 어려워진데다 맞벌이주부들의 불안한 모습을 주변에서 자주 보기 때문에 이러한 회의가 줄어들기도 한다. 대신 부부간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함께 어려움을 이겨나가려 노력하다 보니 부부관계가 개선된다는 것.
부모나 시부모와 함께 사는 방법으로 불경기를 이겨내는 가정도 적지 않다. 회사원 이모씨(34·서울 상계동)는 아내의 취업을 위해 내년초 처가에 들어가기로 했다. 장모가 세살배기 딸의 양육을 맡아주기로 했다. 전세금 6천만원을 은행에 맡기면 연 7백만∼8백만원의 이자를 챙길 수도 있다.
부도가 나거나 집을 친지에게 담보로 잡혀줬다가 친지가 망하는 바람에 합가하는 가정도 있다. 아이보기를 꺼리던 「신식 할머니」들이 경제난 소식에 태도를 바꿔 합가를 자청하기도 한다.
가족이 난관을 이기기 위해 힘을 합치는 모습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외지들이 보도하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 국민이 집단희생정신을 발휘하고 있는 것.
직장인들은 빨리 귀가해 아내나 자녀와 시간을 보낸다. 회사원 이모씨(32)는 『퇴근후 곧바로 귀가해 아내의 일을 도와주거나 아이와 놀아준다』면서 『술값과 심야귀가 택시비가 줄고 아내와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말했다.
가족회의를 여는 집도 크게 늘고 있다. 회사원 유모씨(45·서울 개포동)는 지난 주말 가족회의를 열고 경제살리기운동에 동참할 것을 결의했다. 유씨는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으며 아내(38)는 가계부 쓰기를 약속했고 초등학교 3학년인 외동딸은 몽당연필을 사용하기로 했다. 강모씨(44)는 지난 주 가족회의 때의 약속을 어기고 술에 취해 택시를 타고 늦게 귀가했다가 중학생 딸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
가족회의 끝에 대학생 아들이 군입대를 지원하기도 하고 해외연수를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성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