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양이에게 다른 한마리의 고양이는 그저, 똑같은 한마리의 고양이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 대해서만 인간의 자격을 부여하는, 매우 특이한 존재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짓는 가장 큰 특징은 서로를 똑같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바로 그 점일지 모른다.
「인종이나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는 인간성이란 개념은 인류 역사상 매우 뒤늦게, 그것도 매우 제한적으로 퍼져나갔다. 이 개념은 많은 경우 부족이나 언어집단이라는 경계에서 끝나버리거나, 심지어 마을의 경계에서 무너지곤 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핀킬크라우트. 그는 작년 프랑스의 지성계에 충격을 던진 저서 「잃어버린 인간성」(당대)에서,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보편성을 획득한 인간성의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꼼꼼히 되짚는다.
계몽주의 이후 서서히, 인류애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보편적 개념의 인간성. 저자는 그 보편적 인간성이 진보의 채찍에 이끌린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끔찍한 최후를 맞는 현장을 지켜봐야만 했다.
독일군에 억류됐던 한 전쟁포로의 독백이 이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수용소에는 많은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서 인간을 보지못했다. 그들에게, 나는 더 이상 같은 종(종)이 아니었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었다. 수용소에서 기르던 「보비」라는 개. 그 개에게만은 그래도 나는 인간이었다. 보비는 말하자면, 「나치 독일 최후의 칸트주의자」였던 것이다…〉
두차례의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목격한 저자는 절규하듯 묻는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보편적인 인간성의 개념이, 그것도 가장 화려한 발전을 이룩한 바로 그 문명의 중심에서 그토록 극단적이고 집단적인 망각 속으로 빠져버린 것일까?」
그는 나치의 광기와 스탈린주의의 야만성을 떠받들고 있는 것은 기실, 인간은 무한히 완벽해질 수 있다는 신념, 역사철학에서 절정을 이룬 바로 그 진보사상이라고 갈파한다.
나치와 스탈린주의자는 흔히 오해하듯 이성을 잃은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그들은 이성만 남기고 그밖의 모든 것을 상실한 인간이라고 한다. 역사의 발전을 믿어 의심치않는 헤겔의 이성과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 다윈의 진화론은 예외없이 복수(複數)의 개개 인간을 단수(單數)인 유적(類的)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떨 땐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지. 예컨대 사람들에 의해 간이 도려내진 가엾은 발바리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신음하는지, 자신에게 해를 가한 바로 그 인간의 손을 얼마나 애처롭게 핥아 대는지를 생각하면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반)생체실험주의자들의 말을 따른다면 우리는 콜레라 장티푸스 디프테리아 등을 치료할 혈청을 얻지 못할거야〉
저자는 절규한다. 「인간은 발바리가 아니야…」.
그는 그렇다고 이데올로기를 배제한, 앙리 뒤낭류의 인도주의에 무작정 손을 들어주지는 않는다. 인도주의에 대해서도 「연민은 격이 떨어진 타락한 사랑이며, 모래 속으로 스며들어 없어지는 숭고한 가는 물줄기 같은 것」이라고 그 한계를 지적한다.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진보와 현대성을 하나의 「퇴행(退行)」으로 규정하는 저자. 그는 이 책에서 어떤 분명한 전망이나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렇게 묻고 있다. 「과연 20세기는 유익한 세기인가?」
〈이기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