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국제 신인도가 곤두박질치고 국가 도산이 들먹여지는 「위험한 사회」 한국.
선진국 진입에의 벅찬 꿈이 참담하게 깨지는 현실 앞에 모두 망연자실이다. 멕시코와 태국 인도네시아의 문제들은 먼나라의 일로만 여겼고 풍요한 한국사회, 21세기의 화려한 한국을 노래했다. 이제 그 풍요가 「위험 가득한 풍요」였음을 실감한다. 위기의 먹구름은 한국에 머물지 않고 세계의 금융대국 일본에도 증권회사와 은행의 연쇄파산이란 어둠을 드리운다. 활화산 위의 현대화라는 문명사적 역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세계적인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최근 학계가 새롭게 주목하는 학설이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가 80년대 중반부터 줄곧 제기해온 「위험사회(Risk Society)론」이 그것이다. 80년대 후반 국내에 소개되었을 때에도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위험사회―새로운 근대(성)를 위하여」란 저서에서 베크는 『경제적 근대화는 사회내에 위험의 확산을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후기산업사회, 고도정보사회로 이행하기에 앞서 「위험사회」의 단계를 상정했다. 그는 근대사회의 근본적인 결함으로 의사결정과정의 집중을 지적했다. 근대사회는 기술선택과 투자에 관한 의사결정이 소수에 집중됨으로써 그만큼 큰 이익을 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잘못된 결정이 안고 있는 치명적인 위험도 커졌다는 것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또한 위험은 저성장과 실업같은 경제적인 측면만 뜻하지는 않는다. 범죄와 지역사회의 붕괴 이혼의 증가 등 사회적인 위험, 공해와 지구온난화 생물의 절멸(絶滅) 등 생태학적 위험, 낙태와 암 에이즈 광우병(狂牛病)같은 생명에 대한 위험도 있다. 이같은 위험이 동시에 발생하면 사회의 총체적인 붕괴는 뻔 한 일이다. 어쩌면 이들 위험은 인류역사 속에 상존해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정보통신혁명은 의사결정과정을 집중관리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고 베크의 주장에 따르면 그만큼 잘못 결정하는데 따른 위험도 확대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경제성장의 열매만 크게 보이던 때였고 후기산업사회론에 힘을 얻던 무렵이었다.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고 얼마전만 해도 「고전」으로 치부됐다. 이제 상황은 바뀌었다.
서울대 한상진 교수를 비롯한 중진급 연구자 10명은 「위험사회―한국」을 주제로 유네스코가 발행하는 계간지 「코리아 저널」내년 봄호에 게재할 10편의 논문을 준비중이다. 총론은 한교수가 맡았으며 세부 주제와 필자는 △금융위기 및 경제(인하대 김대환) △부패(서울대 김병섭) △부실교육(서울대 문용린) △부실 건축(건축문화설계사무소장 김영섭) △성폭력(한양대 심영희) △핵 발전(서울대 김정욱) △생태파괴(서울대 김상종) △산업재해(노동연구원 윤조덕) △대형사고와 안전(서울대 이재열) 등이다.
논문은 모두 영문으로 씌어져 한국을 주시하고 있는 세계인과 더불어 문제를 살피자는 기획이다. 어찌보면 낯부끄러운 일일 수 있다. 베크가 지적한 「위험사회」의 징후를 너무 오랫동안 무시해온데 대한 뼈아픈 성찰(省察)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대사회와 문명을 만든 19세기적 패러다임으로는 현재 사회를 설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그마가 된 마르크시즘의 전통에 혹은 파묻히거나 혹은 알레르기 반응 속에서 헤어나지 못해왔던 지식계층의 반성이다. 그래서 창피하지 않다.
열차탈선 여객선 침몰 비행기 추락사고,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행주대교 붕괴, 「황태자」 김현철 비리와 한보그룹 부정사건, 인신매매와 어린이 납치살해 잔인한 친족살인, 법안의 날치기 통과, 영웅이 된 쿠데타 주역, 모든 부문을 움켜쥐려는 재벌그룹의 탐욕…. 에밀 뒤르켕이 한 세기 전에 지적했던 「아노미」현상을 보여주는 듯한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단면들.
한국적 위험사회의 이러한 징후를 한상진교수는 「돌진적(突進的)근대화」의 부작용이라 분석한다. 단지 부작용에 그치지 않고 오늘 한국사회의 총체적 위기를 낳게 한 이들 사건 사고 뒤에 도사린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물질적 가치관의 팽배와 사회 모든 부문에 퍼진 부정부패 부실공사 대형교통사고로 마비된 정의감, 낙태 친족살인 인신매매로 상징되는 생명경시풍조, 끝장을 보고야마는 개인적 집단적 이기주의의 범람, 사회의 위험을 통제하기는 커녕 비리의 온상이 된 경직된 관료제였다. 수없이 비상벨은 울렸지만 모두들 「잘못 울렸거니」 했던 것이다.
한교수는 『다리가 무너지고 도로한복판의 도시가스가 폭발한 것은 토목건축공학 또는 가스관 지하매설같은 기술공학적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는 명백히 돌진적 근대화가 가져온 위험사회의 명백한 징후』라고 주장한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이나 80년대초와 90년대들어서 발생한 서구의 대불황을 경기변동의 순환주기설로 풀어보려는 시도는 많았다. 그러나 오늘 한국의 사회가 맞고 있는 위기는 그같은 서구모델, 베크의 위험사회론으로도 풀 수 없는 좀더 고질적인 문제로 보는 시각이 많다.
베크가 분석한 것은 강력한 계층구조가 뒷받침한 독일사회였다. 사회적 유동성이 낮고 사회적 반응 또한 이익집단에 따라 크게 다른 사회였다. 그같은 사회의 고통과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외에는 어떤 패러다임도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사회의 고통이 같을 수 없다. 노조운동 청년운동 여성운동 등 많은 운동조차 방향성이 없이 흔들리고, 대통령 당선자의 말한마디에 경제주체들이 이리 쏠리고 저리 몰리는 풍토에서 한국사회가 겪는 고통, 그 업(業)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정보혁명에 수반된 세계화는 아직 진정한 의미의 근대성조차 다지지 못한 한국사회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정보의 리얼타임화는 금융위기같은 위험을 특정 사회, 한 국가에 묶어두지 않고 순식간에 아시아 전역으로, 세계로 번지게 한다.
「위험사회」의 요소를 제거하여 「성찰적 근대화」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한교수는 「신뢰의 회복」을 든다. 외채의 실상을 감추고 엉터리 자료로 국민을 우롱하다 국가부도에 몰린 한국사회이기에 더욱 그렇다. 소수권력자들의 술수와 협잡, 비리와 사기가 더이상 사회구성의 으뜸 원리여서는 위험사회로부터의 탈출은 없다. 정치의 탈권력화, 사회의 정치화를 통해 정보의 공개, 공유를 이룩하고 투명성에 바탕한 신뢰가 사회의 으뜸 원리가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근대화라는 주장이 「위험사회론」의 교훈인 것이다.
사회구성체원 모두 올바른 정보를 즉각 공유하고 지혜를 모은다면 어느 시기의 사회보다 빠른 회복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 정보사회의 강점이기도 하다. 일본의 학계가 최근 적극 주창하는 「사회정보론」이 정보화된 사회의 분석에 그치지 않고 「정보의 사회화」를 강조하는 것도 일맥상통한다.
『새로운 체제는 과거의 것을 파괴하지 않고 일어날 수 없다』
오귀스트 콩트가 일찍이 인류진보의 법칙을 말하며 강조했던 대목은 체제해체의 위험에 놓인 한국사회에 그나마 위안이요 희망일 수 있다.
〈조헌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