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남편과 여행을 떠난다. 요즘같이 우울할 땐 부쩍 재작년 연말에 갔던 서해안 구례포가 생각난다.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땅. 남편과 나 둘만 아는 곳. 구례포는 바로 그런 곳이었다.
당시 우리는 서산 태안을 거쳐 반계를 지나 학암포로 가는 도중 ‘구례포’라고 쓰인 허름한 표지판을 만났다. 서너채 집이 모여있는 마을을 지나 좁은 오솔길을 1㎞가량 더 달렸다. 마침내 썰물로 물이 빠진 드넓은 바닷가. 남편과 단 둘이서 그 넓은 해변을 독차지했다. 웅웅대는 바람소리와 커다란 파도가 산처럼 밀려왔다. 속이 시원해졌다. 공해와 걱정거리, 불만, 생활에 찌든 마음속과 머릿속이 텅비는 듯한 기분. 남편과 나는 껑충껑충 뛰고 달리고 소리지르고. 해변을 뒤로 하고 바다쪽으로 차를 몰면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 섬처럼 느껴지는 차 안에서 맛보는 통쾌함!
구례포 해변은 단단한 진흙이라 차바퀴가 빠질 염려도 없고 철책도 초소도 없다. 해변에 밀려오는 파도위를 달리는 차소리, 유리창을 때리는 물보라소리, 어느새 짧은 겨울해가 진다.
서해안의 해 지는 모습을 사진이나 그림으로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순식간에 바다로 떨어지는 빨간 해와, 그 넓은 바다와, 하늘을 온통 주홍빛으로 물들이는 광경을 어떻게 다른 사람의 눈을 빌려 보겠는가?
그날, 나와 남편은 일년내내 쌓였던 스트레스를 몽땅 풀고 새해를 기분좋게 맞이했다. 이후로 가슴이 답답할 때면 우리는 서로에게 구례포를 떠올려준다.
난 요즘 간절히 구례포에 다시 가고싶다. 파도가 높은 날을 일부러 골라 내게로 덮쳐드는 파도를 향해, IMF파도를 향해 덤빌테면 어디 한번 덤벼보라고 고함쳐 보고싶다.
지인숙<웅진출판 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