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생산의 삼중삼각형 모델에 따르면, 하나의 작품을 감상하기까지 관객은 세 단계의 행위를 성취해야만 한다. 첫째는 물질적 대상을 지각하여 지각편린을 생산하는 단계이며, 둘째는 그 지각편린을 기호화하여 작품으로 받아들이는 단계이고, 셋째는 작품을 감상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고 미적 감흥을 얻는 단계이다(도표 참조). 다시 말해서 관객은 지각하기, 기호화하기, 감상하기라는 세 가지 ‘작업’을 해야 하며 작가는 이러한 관객의 ‘작업’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한다.
관객은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지각하기와 기호화하기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앞사람의 머리에 가려 작품이 안 보인다든지(지각하기의 실패), 개념미술적 작품의 하나로 전시된 의자를 작품으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거꾸로 작품이 아닌 전시장의 가구들이나 벽에 얼룩진 것들을 작품으로 받아들인다든지 하게 되면(기호화하기의 실패) 제대로 된 감상은 이루어질 수 없다.
현대 미술 이전의 시기에 관객과 작가 사이에는 지각하기와 기호화하기라는 행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자는 일종의 암묵적인 계약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관객이 아무 불편 없이 작품을 지각하고 기호화할 수 있도록 작품을 만들어 주는 것이 작가의 의무로 간주되었다. 예컨대 회화의 경우는 일정한 프레임 안에 작품을 가두어 놓아 작품을 둘러싼 주위의 환경(벽이나 가구 등)으로부터 작품을 뚜렷이 구별함으로써 관객들이 아무 불편 없이 쉽게 작품을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였고, 조각 작품은 흔히 단상에 올려놓아 다른 물적 대상들과 뚜렷이 구별시킴으로써 작품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시기의 관객의 역할은 감상하기에 한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현대 미술은 관객에게 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관객에게 감상하기(세 번째 단계)에 머물 것이 아니라 기호화하기의 과정(두 번째 단계)에도 적극 참여해줄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니멀리즘이나 슈퍼마티즘, 구성주의, 레디메이드, 개념미술, 옵틱 그리고 최근 실내외의 환경조각에 이르기까지 현대 미술의 여러 흐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이러 저러한 것이 예술작품이다’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끊임없이 도전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관객은 항상 새로운 것, 지금까지는 미술작품이라 여겨지지 않았던 것들을 기호화하여 작품으로 받아들일 것을 끊임없이 요구받고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현대 미술은 관객에게 기호생산의 두 번째 단계인 기호화하기의 노력까지는 요구하였지만, 가장 기본적인 지각하기(첫 번째 단계)를 적극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서 쉽게 지각될 수 있는 것을 관객에게 제공하는 것이 작가의 기본적인 의무로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보기에 김용철은 이러한 통념에 의식적으로 도전하고 있는 유일한 작가이다. 그는 기호생산의 첫 번째 단계인 지각하기의 과정을 화두로 삼아 관객에게 지각하기―기호화하기―감상하기의 세 단계 ‘작업’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예술의 모든 재료(매체)는 인간의 몸에 의해 지각될 수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예술의 가장 기본적 전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바로 김용철의 작품들이다. 그는 처음부터 눈에 잘 안 띄는 재료로 무엇인가 기호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이는 분명 예술과 커뮤니케이션 과정의 기본 전제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다.
김용철의 작품이 설치된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들은 우선 당황하게 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 일상 생활에서 볼 수 없는 예술적인 어떤 것을 만나리라는 기대와 설렘은 허망하게 무너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게 뭐야? 아무것도 없네… 뭐가 잘못 됐지?”라는 회의, 절망, 좌절, 실망이 바로 작가가 일차적으로 의도하는 바다. 이러한 의문과 당혹감을 관객 스스로가 극복하기를 김용철은 기대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관객에 대한 대단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관객 스스로가 자신의 좌절을 극복하고, 피동적인 자세에서 탈피하여 능동적으로 무엇인가 찾아 나서는 적극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그의 작업의 출발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분명 무엇인가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좀 더 주의력을 집중시키는 관객에게 김용철의 작품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적극적인 지각하기의 노력을 기울이는 관객은 하얀 벽에 수직으로 꽂혀 있는 젓가락 크기 정도의 가냘픈 대나무 조각을 발견하게 된다. 좀 더 주위를 둘러본다면 그는 전시장 벽에 한 두 개씩 꽂혀 있는 얇은 대나무 젓가락(?)들을 몇 개 더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선은 대나무만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된다. 보다 더 주의 깊은 관객이라면 또한 그 가냘픈 대나무 끝에 하늘하늘 매달려 있는 자그마한 정육면체를 발견할 수 있다. 투명한 낚싯줄을 꼬아서 만든 자그마한 이 입체는 공기의 흐름에 따라 항상 섬세하게 흔들리고 있다. 마치 풀잎 끝에 매달린 아침이슬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애처로움마저 지니고 있다. 필자는 이 작품들을 감상, 아니 발견해내는 관객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다. 이 투명한 입체를 발견하는 순간 대부분의 관객들의 얼굴에는 항상 잔잔한 미소가 어리게 마련이다. 아마도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성취한 자의 만족스러운 표정, 또는 무엇인가를 깨달은 자의 미소가 바로 이런 것이리라.
김용철의 작품들은 관객이 작품을 지각한다는 것은 결국 작품에 대해 능동적으로 ‘일’을 하여 자신의 지각편린을 생산해내는 과정이라고 주장하는 메를로 퐁티의 명제를 그대로 체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관객들은 각기 얼마만큼 성공적으로 지각하기를 수행했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예컨대 김용철의 ‘검은 종이’를 통해서 어느 관객은 커다란 검은 종이만을 볼 뿐이며, 다른 관객은 검은 종이 위의 이상한 자국 몇 개만을 볼 뿐이고, 또 다른 관객은 검은 종이와 무수히 많은 정육면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주의깊은 관객 몇 몇만이 검은 종이의 검은 색이 사실은 하얀 종이 위에 연필로 칠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겨우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이 얼마만큼 적극적으로 작품에 주의력을 기울이느냐에 따라 각각의 관객은 각기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즉 동일한 대상으로부터 각기 다른 지각편린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관객은 자신이 생산해 낸 지각편린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대상을 기호화하고 감상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김용철의 작품은 관객의 참여의 정도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김용철의 작품은 관객과 작품 사이의 상호작용에 기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작품의 상호작용성이 단지 컴퓨터나 비디오 등의 인위적인 전자 장치의 도움을 받은 작품(예컨대 게리 힐의 ‘위더신’ 등)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하얀 종이를 연필로 색칠하여 검은 종이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김용철의 작품은 노동 집약적이다. 아니, 노동 낭비적이다.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노동을 들여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상당히 비효율적이며, 비자본주의 적이다. 그는 우리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노동은 항상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상식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셈이다.
수천 장이 넘는 종이를 한 장 한 장 풀칠하여 붙여서 하나의 기둥처럼 쌓아 올리는 작품에서도 이러한 ‘노동비효율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노동비효율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굵은 통나무나 두꺼운 나무판의 한 쪽을 계속 깎아서 젓가락 굵기, 이쑤시개 굵기에서 마침내 머리카락처럼 가늘어지는 작품들이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 연필로 색칠하기나 통나무 한 쪽을 가늘게 깎아나가기 등의 작업은 대단히 자기 부정적이며 역설적인 작업이다. 작업할수록 자신이 해 놓은 작업은 눈에 안 보이고, 작아지고, 나약해지고, 섬세해지고, 미세해진다. 장엄하고 웅장한 노력이 가냘프고 섬세한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작품을 마주하고 있자면, 우리의 시선은 자연히 가장 가늘어진 끝에 머물게 된다. 그 극단의 미세한 ‘머리카락 끝’같은 부분이야말로 김용철의 또 다른 형태의 속삭임이다. 하늘하늘대는, 금방이라도 부러져버릴 것 같은, 점차 미세함의 극치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나무의 그 끝은 있음과 없음이, 물질과 비물질이, 노동과 정신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연속과 절단’이, (메를로 퐁티가 말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만나서 화해하는 접점이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함을 통해서 많은 것을 말하려 했지만, 김용철의 작품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하며, 비물질적인 것을 물질을 통해 나타내려 한다. 침묵을 이야기하려 한다. 아니, 침묵을 그저 중얼거리듯 속삭인다. 이러한 속삭임을 통해 김용철은 관객에게 감상하기와 기호화하기 뿐만 아니라 지각하기라는 세 가지 ‘작업’을 모두 충실히 수행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김용철의 작품은 관객에게 새로운(어쩌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고 나아가 관객―작품―작가의 관계를 새로 정립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최대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최소의 것을 얻으려는 역설적이고도 고통스러운 작업을 이 젊은 작가가 얼마나 계속 감당해낼 수 있을지를 우리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김주환(美 보스턴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