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푸른’ 작가 최인호. ‘연어를 기다리는’ 시인 안도현.
우리의 주변과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며 삶의 온기를 지펴온 두 문인. 무심히 스치는 고만고만한 사연과 사물 속에서 두레박으로 깊은 우물물을 긷듯, 작고 소중한 깨우침을 건져온 그들.
두 작가가 나란히, 짧은 이야기들을 모아 책을 냈다. 최인호의 ‘작은 마음의 눈으로 사랑하라’(제삼기획). 그리고 안도현의 어른을 위한 동화 ‘관계’(문학동네 펴냄).
“어느 가정에서나 일어날 수 있고 어느 가족이나 겪는 평범한 이야기들이야말로 우리 삶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최씨.
IMF의 삭풍(朔風)이 몰아치는 추운 계절에 그의 글은 가슴을 덥히는 위안의 불씨로 달아오른다.
여름철이면 파도처럼 밀려드는 우울증. 마음을 달래려 청계산을 찾은 작가는 우연히 맹인들과 마주친다. 여느 등산객들과 다름없이 박수도 치고 노래도 부르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그들.
마침 담배를 피워물고 있던 그는, 그 중 한명이 다가와 담배를 꺼달라고 정중히 부탁하자 그 순간, 아찔해짐을 느낀다. 앞 못보는 그들. 어찌 이리 쾌활하고 명랑한가. 가슴이 아려온다. 멀리, 기억 저편에서 피어 오르는 헬런 켈러의 수필 한 대목.
“봄이 오면 나는 벚나무의 가지를 손으로 더듬어 봅니다. 벚나무 등걸 속으로 흐르는 물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놀라운 기적을 그냥 지나쳐버리고 말지요. 여러분들이 하루에 한시간 만이라도 장님이 되거나 귀머거리가 될 수 있다면 저 벚나무의 꽃과 저 나뭇가지를 날아다니는 새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큰 은총인지 깨달을 수 있을텐데.”
작가가 가족들에게 쏟는 관심과 사랑은 애틋하다. 글 곳곳에서 ‘행복의 지름길은 바로 코 앞에서, 우리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안톤 슈나크의 속삭임이 귓전을 간지른다.
“아들녀석의 잠바를 빌려 입으면 옷에서 아들 냄새가 난다. 아들녀석도 가끔 내 옷을 빌려 입으니, 아들의 옷에서도 내 냄새가 날 것이다. 가엾은 우리 아버지는 마흔아홉살에 돌아가셨다. 그 때 내 나이가 열살이었으니 아버지는 아들의 옷을 빌려 입는 그 즐거움을 맛보지 못했다. 가엾은 아버지….”
시인이 쓰는 동화 ‘관계’. 넘치는 서정과 투명한 감성 속에 어리는 생명의 빛. 일년 열두달 자연과 계절의 변화를 좇는 심상(心象)에, 새처럼 여리고 맑은 영혼이 깃들인다.
짧은 비유 속에 녹아 있는 삶의 긴 여운…. 절로 마음이 넉넉해진다. 시적 상상력만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살만한 것일까.
톡,
하고 땅에 떨어진 도토리 하나. 갈참나무 가지에서 땅으로 떨어진다는 것, 그것은 도토리에게 새로운 삶이 막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너무 캄캄한데….”
그때,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언제부터인가 나뭇가지에서 보이지 않더니 먼저 땅에 내려와 있던 나뭇잎이 속삭인다.
“도토리야, 춥지?” “응. 조금” “우리가 이불이 되어줄게.” 낙엽들이 도토리를 둘러싼다. 도토리는 이제 강보에 싸인 귀여운 아기 같다. 참 고마운 낙엽.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낙엽에 파묻힌 도토리는 답답하다. 머리를 흔든다. “굳이 이렇게 숨어서 살아야 하나?” 낙엽들이 다정하게 다독인다. “아니야. 너 자신을 포기해서는 안돼.”
하지만 도토리는 지긋지긋하다. 아무렇게나 자신을 내팽개치고 싶다. “차라리 인간의 눈에 띄어 마을로 가거나, 쥐들의 먹이가 되었으면 좋겠어.”
“도토리야. 너는 살아 남아야 해. 그래서 이 세상하고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해.” “관계를 맺는다는 게 뭐지?”
“그건 마음 속에 오래 품고 있던 꿈을 실현한다는 뜻이야. 너는 너 자신의 꿈 뿐만 아니라 우리 낙엽들의 꿈까지도 실현시켜야 할 소중한 존재야.” “나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지마. 나는 꿈 같은 건 없어. 어서 이 지루한 시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밖엔.”
낙엽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토리를 꼭, 껴안는다. “도토리야. 네 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니?” “글쎄….”
바스락거리던 낙엽들이 도토리의 얼굴에 가만히 볼을 댄다. 나직하지만 힘있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놀라지마라. 도토리야…. 네 몸 속에는, 갈참나무 한 그루가 아주, 싱싱하게 자라고 있단다….”
〈이기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