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호랑이의 눈’ 전시회장을 돌면서 나는 문득 ‘행복의 충격’이라는 김화영 교수의 글을 떠올렸다. 그랬다. 전시회 ‘호랑이의 눈’은 충격이었고 그것은 행복한 여운으로 오래 가슴에 남았다.
주변에서 늘 무심하게 보아왔던 소재들이 작가의 가슴을 빌려 놀라운 변신(?)을 한다. 차가운 소재들이 그처럼 따뜻하게 다가올 수가 없다. 상상력의 충격이며, 이 역설이 전시회의 신선함으로 이어진다.
전시장 입구, 질식할 것같은 48개의 얼굴이 부서져내리듯 천천히 움직이는 임영선의 ‘풍요로운 나라’앞에서 젊은 관객들은, 소박한 탄성을 지른다. 인간의 정체성을 바라보고자 한 그 얼굴 하나하나에서 자신의 얼굴을 찾으려는 눈빛들이다.
육태진이 보여주는 허무는 무엇일까. 그의 작품 ‘유령가구’의 소재는 고가구나 재봉틀처럼 구체적이고 따뜻하다. 그러나 옛 가구 속에 자리한 화면 안에서 한 사나이는 걷고 또 걷는다. 그러나 그는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적막하다.
김영진의 ‘액체’는, 물방울의 움직임이라는 시간과 그것의 변화를 확대시켜 화면에 보여주는 기계와의 아름다운 만남이다.
박화영의 ‘숲’은 거리의 떠돌이 개를 집요하게 따라가는 15분간의 비디오 작업이다. 그리고 그 위에 작가가 자신의 일기를 읽는 듯한 내레이션이 깔린다. “저는 당신이고 싶습니다. 당신이 저였으면 합니다”라는 작가의 말은 한밤에 듣는 친구의 고백처럼 가슴에 와 얹힌다.
‘호랑이의 눈’ 전시회를 돌아보고 나오던 날의 내 마음의 풍경도 그랬다. 어느 젊은 날, 친구의 하숙방에 찾아가 그의 쓸쓸하기만한 고백을 들으며 문득 내다본 작은 창에 잎떨어진 나뭇가지가 겨울바람에 흔들리고 있던 그 한겨울의 추억같은.
낡은 창틀과 또 그만큼 낡은 의자라는 소재를 한순간 잔잔한 슬픔으로 환치시키는 조숙진의 작품 앞에서 나는 오래오래 서 있었다. “다만 놓는다는 것이 이렇게 감동적인가”자신에게 묻고 또 물으면서.
그렇게 해서 이 전시회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너절한 잠옷을 입고 지내던 무의식을 일깨워 주는 화려한 외출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행위가 대상의 재현이 아닌 ‘표현’이라는 상식을 새삼스레 확인하는 즐거움으로 이어진다.
전시회 이름이 ‘호랑이의 눈’이라고 해서 무슨 민화전시회쯤으로 알 사람들에게 이 작품들은 찬란한 배반이다. 뉴욕 소호의 액시트아트와 일민미술관이 함께 마련한 전위적인 작품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시회의 기획에는 놀라운 번득임이 있다.
무엇보다도 ‘전위’라는 말을 넘어서서 다가오는 친근감이 그것이다. 전시회장에서 뜻밖에도 젊은 관람객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도 그런 친화감 때문이 아닐까. 28일까지. 02―721―7772
한수산(세종대 교수·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