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악단으로 일컬어지는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 지난 시절 카라얀의 지휘봉 아래 강철같이 정확한 연주로 널리 알려졌다. 찌르듯 귀를 파고드는 금관의 기계적 음향을 들으면서 음악팬들은 “지독한 게르만인들…”이라며 혀를 찼다.
그러나 지금 이 악단을 이끌어가는 사람들 상당수는 외국인이다. 지휘자는 이탈리아인(아바도)이고 플루트 수석주자도 프랑스 출신인 에마뉘엘 파후드.
이 파후드가 고국의 풍부한 근현대 플루트음악 유산을 연주해 한장의 CD에 담아냈다. 음반 제목은‘파리’. 풀랑의 소나타, 이베르의‘유희’, 메시앙의 ‘검은 새’ 등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작품 8곡이 담겼다.
세계 최고악단 수석으로 활동하면서 솔리스트로 이름을 굳힌 파후드. 그의 이력은 아일랜드 출신인 제임스 골웨이와 닮아보인다. 현존 최고의 플루트 스타로 파바로티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골웨이는 75년까지 베를린 필 수석주자를 지냈다. 거장적인 기교와 따뜻한 미소는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자산이었다.
그러나 스타성에 있어서 파후드는 골웨이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5년 전 약관 22세의 나이에 베를린 필 수석자리에 오른‘천재성’이 첫째 자산이고, 배우 뺨치는 수려한 외모가 둘째.
세계 5대 메이저음반사 중 하나인 EMI에서 음반을 낸 것은 작년 모차르트의 협주곡집이 처음. 그는 이 음반 하나로 단숨에 주목받는 존재가 됐다. 빠른 악구를 깃털처럼 날렵하게 소화하면서도 꽉찬 음향으로 진한 인상을 그려넣는 모습은 새로운 목관악기 스타의 탄생을 예고했다.
새 음반 ‘파리’에서 그의 개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8곡의 프랑스 근현대음악은 매끈한 선율보다는 다양한 음색의 변화와 개성적인 표현이 강조되는 작품들.
그의 음색은 골웨이처럼 두텁거나 밝게 흩날리지도, 랑팔처럼 목질의 소박한 느낌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가늘지도 굵지도 않게 적절한 두께의 질감을 유지하며,지나친 비브라토(소리떨림)를 배제하는 대신 한없이 매끈하고 유연하며 차게 빛난다.
원래 플루트의 본고장은 독일. 18세기 프로이센의 계몽군주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포츠담의 상수시 궁에서 악사들을 모아놓고 플루트 주자로 직접 연주에 참가했다. 1832년 독일인 테오발트 뵘은 플루트의 구조를 대대적으로 혁신, 19세기 중반의 ‘악기혁명’을 열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플루트의 주도권을 프랑스로 넘기는데 한몫했다. 당시까지 플루트가 작은 소리와 은은하고 목가적인 성격을 가진 악기였던 데 비해 뵘이 만든 새 악기는 밝고 화려한 음향으로 프랑스의 기질에 오히려 맞았다. 02―3449―9423∼4
〈유윤종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