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선비론(19)]寧齋 이건창의 「反개화사상」

  • 입력 1998년 2월 19일 20시 05분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대문장가인 영재 이건창. 그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양명학을 이어받은 강화학파의 적자(嫡子)인데다 매사에 원칙과 냉철함을 잃지 않았던 대쪽 선비였다. 이건창은 개화에 반대했던 인물로도 유명하다. 단발령에 반대했고 1894년 갑오개혁에 대해서도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김옥균(金玉均)을 일러 ‘판돈이나 크게 벌이려는 도박꾼’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가 이토록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개화에 반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유년기의 쓰라린 기억에서 반(反)개화의 배경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기억은 바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의 사정권에 놓여 있었던 고향 강화도의 비극이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프랑스가 통상(通商) 등을 요구하며 무력으로 강화도를 점령했다. 40여일간 온갖 만행이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외규장각을 불태우고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그때 이건창의 나이 겨우 15세. 5년 뒤엔 미국까지 강화도를 침략(신미양요·辛未洋擾)해왔으니 그의 충격과 분노는 엄청났으리라. 이처럼 개화의 상처로 얼룩진 고향땅을 바라보며 이건창은 일찌감치 서양 열강의 불순한 음모, 개화의 허구를 몸으로 느낀 것은 아니었을까. 단정은 금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건창이 개화라는 시대의 흐름을 무조건 반대했던 것만은 아니다. 미국을 다녀와 개화를 주장하는 서재필(徐載弼)을 보고 독백처럼 내뱉은 그의 말 한마디가 이를 잘 보여준다. “나에게도 새로움이 있고 새 것을 추구하려는 의도가 어찌 없겠는가. 발전하는 나라의 모습을 본받고 싶은 생각이 어찌 없단 말인가.” 개화와 전통, 그 사이에서 고뇌하고 갈등했던 이건창. 그럼에도 그의 선택은 전통이었으니 조선 성리학 5백년 유맥(儒脈)을 계승하는 것이 더 시급한 책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전통을 버린 개화는 허명(虛名)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건창의 굳은 신념이었다. 〈이광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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