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지식의 세계」,지성인17명의 알찬「교양강좌」

  • 입력 1998년 3월 6일 07시 32분


「지식의 세계」 (박정호 엮음 동녘 펴냄)

신영복교수(성공회대)가 대학 신입생에게 띄우는 엽서. 차치리(且置履)의 일화로 말문을 연다.

차치리라는 사람이 어느날 장에서 신발을 사려고 발의 크기를 본으로 떴다. 종이 위에 발을 올려 놓고 발의 윤곽을 그렸다. 탁(度)을 뜬 것. 그런데 장에 갈 때 깜박 탁을 놓고 왔다. 이를 알고 다시 집에 가서 탁을 갖고 왔으나 장은 이미 파한 뒤였다.

“탁을 가지러 집에 갈 필요가 어디 있소.당신의 발로 신어보면 될 일 아니오”라는 말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려면 발이 탁만큼 정확하겠습니까?”

대학의 강의실이든 어느 공장의 작업대든, 그 어느 곳에 있든 탁이 아닌 발을 상대하라는 이야기다. 족과 탁이 온통 뒤바뀌어 있는 우리 현실에서 ‘살아 있는 발’로서 새롭게 사고하고 행동하라는 것.

동녘에서 펴낸 ‘지식의 세계’. ‘당대의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주제별로 엮었다. 책에 담긴 사유(思惟)의 깊이와 넓이가 가히 ‘21세기를 향한 지적 순례’라 할 만하다.

세상과 인생을 탐구하는 지적 여정의 안내서라고 할까.우리 시대의 지성이 펼치는 ‘지상 교양 강좌’랄까.

산더미 같은 자료를 뒤져, 고르고 골라 뽑은 글들은 ‘배움과 삶’ ‘현대세계의 이해’ ‘근현대 한국 탐사’ ‘한국 사회의 몇가지 문제와 시각’으로 묶여졌다.

신교수가 징역살이 할 때 알게 된 노인 목수 이야기.

노인 목수는 무얼 설명하면서 땅바닥에 집을 그리는 데 그 순서가 보통 사람들과 전혀 달랐다. 지붕부터 집을 그리는 게 아니고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그렸다.

신교수는 ‘일하는 사람’의 그 그림을 보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부터 그려온 나의 무심함이 부끄러웠습니다. 나의 ‘서가(書架)’가 일시에 무너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백욱인교수(서울산업대)의 ‘디지털 시대 신(新)문화론’.

인터넷의 가공할 잠재력과 파괴적인 속성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그리고 산업사회의 망령인 ‘남보다 먼저’가 아닌, ‘남과 함께’라는 공동체 윤리와 ‘남과는 달리’라는 창조성이 만나는 디지털 시대의 대안 문화를 꿈꾼다.

바이러스처럼 무섭게 분열하고 성장하는 네트. 네트는 인간의 문화적 DNA를 복제하고 복제된 문화의 DNA는 네트라는 배양기에서 국경과 시간을 초월하여 증식한다. 산업혁명기의 선반이 육체의 힘을 확장했다면 컴퓨터는 마음과 지식의 힘을 확장한다.

“네트와 네트를 잇는 인터넷은 20세기 말의 산꼭대기에서 21세기로 굴러 떨어지는 눈덩이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는 디지털 문화의 한계를 뚫어 본다. 그것은 아직 네트라는 터전에 뿌려진 작은 씨앗일 뿐이며, 네트의 환경과 씨앗의 성분에 따라 나쁜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아예 싹을 틔우지 못하는 불임의 문화로 끝날 수도 있다.

네트의 진정한 독립은 현실세계의 뿌리에 끈끈하게 들러붙어 현실 자체를 변혁시키는 ‘일상의 모반’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강조한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대안문화는 사회 곳곳에서 행해지는 새로운 문화의 실험과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디지털 시대의 대안 문화는 새로운 사람과 열린 마음에서 나온다.사이버 스페이스의 대안 문화를 꽃피우려면 무엇보다 먼저 사이버 스페이스의 진정한 뿌리인 우리 삶의 텃밭을 기꺼이 갈아엎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 사이버 스페이스는 현실세계의 ‘덤’일 뿐이다….”

그리고 김종철교수(영남대)의 ‘시의 마음과 생명 공동체론’.

그는 단순히 환경문제에 대한 깨우침이 아닌, 삶의 근원적인 자세에 대해 잠언적(箴言的)인 큰 가르침을 던진다. 전지구를 하나의 생명공동체로 보는 시적 사고, 시인의 감수성만이 산업사회의 피폐성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나침반이라고 역설한다.

시인의 감수성이란 어떤 것인가.

‘갈가마귀 울음에/산들 여위어 가고’라고 노래했던 김현승 시인. 그는 갈가마귀를 떠나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을 산에서 보았다.

‘늙은 호박이 다리 밑에서 자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고 읊은 어느 노시인. 그는 사물과 자신의 관계를 ‘나와 그것’이 아닌, ‘나와 그대’와의 관계로 보고 있다.

만물이 하나이고 형제라는 생각. 그렇게 느끼는 마술적 사고, 신비적 직관. 사물간의 내재적 친연성(親緣性)을 뚫어보는 마음.

김교수는 이같은 시인의 마음이야말로 아폴로 우주선에서 조종사들이 지구를 바라보던 바로 그 마음이라고 한다. 허공에 떠 있는 작은 공, 너무 아름답고 작고 갸냘픈 지구를 바라보던 그 마음. 자기의 가족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터전으로서 지구가 허공 중에 아슬아슬하게 떠 있다는 ‘전지구적 관점’의 연민.

그는 아메리칸 인디언 문화에 그같은 생명공동체 사상이 오롯이 녹아 있다고 한다.

“인디언들은 집을 지을 때,집도 생명체니까 뿌리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집터의 바닥에 선인장 몇 뿌리를 반드시 먼저 파묻는다고 합니다.

이러니 인디언들이 거대한 콘크리트로 빌딩을 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인디언은 어떠한 반생명적인 테크놀러지나 문명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세계관과 감수성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살았습니다.

인디언들이 집을 지으면서 선인장을 심는 것을 비합리적인 미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기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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