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신촌리 9호고분 옹관묘(甕棺墓)에서 출토된 지 80년 만인 지난해 국보로 지정된 금동관으로 5세기 백제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었다.
그러나 백제가 아니라 마한에서 제작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제작자를 둘러싼 논쟁이 일 것으로 보인다. 이종선 우리문화연구소대표(고고학)는 최근 이 금동관의 형식과 고분유형, 함께 출토된 유물 등을 정밀 검토한 결과, 5세기 최말(6세기 직전)에 후기 마한 토착세력이 만든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동안 백제 금동관이 아니라는 견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화재위원회가 국보로 지정하면서 그 시대를 백제가 아닌 삼국시대로 규정한 것도 이러한 이유때문이었다.
이대표는 금동관이 백제양식일 수 없다는 근거로 △관의 금동판(板)에 작은 점들을 돌출식으로 장식했고 △관에 세워진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기둥이 세개이며 △가운데 나뭇가지장식 맨 위쪽에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이 있고 주변에 나선형 장식이 있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즉 이러한 특징은 백제금관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신촌리 9호분의 고분양식, 함께 발굴된 각종 부장품이 마한 토착 양식을 취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5세기말 영산강유역에 살던 후기 마한 토착세력의 금동관이라고 주장했다.
〈이광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