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점에서 21일 서울 서초동 외교안보연구원에서 열린 한국정치학회 특별학술회의(동아일보 후원)‘한국 정치경제의 위기와 대응―김영삼정부의 평가와 김대중정부의 과제’는 학계 및 일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제1부와 제3부에서는 김대중정부의 과제에 대한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김영삼정부의 평가가 이뤄졌고 제2부 ‘경제위기의 원인과 대응’에서는 정치학술회의에 이례적으로 경제학자까지 참여, 재벌개혁과 동아시아 성장모델의 지속 가능성 등을 주제로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
[2부 <경제위기의 원인과 개혁방향>]
▼국제정치경제의 변동과 동아시아 모델(경상대 백종국·白鍾國)〓한국의 외환위기를 보고 ‘동아시아 모델의 위기’를 논하기는 아직 이르다. 이 모델의 본질은 ‘공동체적 자본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80년대를 거치면서 정경유착과 부동산투기 등을 일삼는 천민자본주의 지배연합이 득세, 동아시아모델 특유의 유연성과 공동체적 관점을 상실했다.
여기에 무조건적 규제완화와 시장의 자유만을 부르짖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요 정책을 결정하면서 금융시장에 의한 자원배분에 실패,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한국 위기의 주범은 ‘동아시아 모델’자체가 아니라 이 모델에 무리하게 주입된 ‘시장만능주의’다.
▼한국 경제위기의 원인과 개혁방향(서울대 정운찬·鄭雲燦)〓현재의 위기는 일상적 외환위기가 아니라 제도 또는 구조의 위기다. 그동안 우리나라를 지배한 철학은 ‘성장’이었다. 이 때문에 정부는 대기업의 도산을 막아야 했고 기업은 ‘망하지 않으려면 규모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 아래 무분별한 팽창을 추구했다. 이러한 재벌의 과잉투자가 한국경제위기의 주범이다.
이제 게임의 룰을 확립해야 한다. 그룹 대 그룹이 아닌, 기업 대 기업의 경쟁을 유도해야 할 것이다. 시장주의에 충실하다는 것은 모든 규제와 감독을 포기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업간 공정거래와 회계를 국제규범에 맞추는 일 등 제도개혁에 대한 정부의 역할은 더욱 커져야 한다.
▼한국자본주의의 개혁방향―재벌정책을 중심으로(고려대 임혁백·任爀伯)〓박정희시대 이후 ‘한국 기적의 견인차’였던 재벌은 오랜 정경유착을 통해 금융시장의 왜곡과 자원의 낭비를 가져왔고 급기야 지난 40년간 쌓아온 경제기적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린 주범이 됐다.
재벌은 스스로 개혁할 수 없는 공룡으로 변했기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 개혁될 수밖에 없다. 재벌개혁을 추진하는 김대중정부에 IMF는 최대 우군(友軍)이 될 것이다. 기업 재무구조 개선, 채무보증 금지, 외국인의 인수합병(M&A) 허용 등 IMF 프로그램은 재벌총수에 의한 선단식 그룹경영을 어렵게 할 것이다.
▼한국 정치경제의 위기와 대안 모색―‘민주적 시장경제’를 중심으로(고려대 최장집·崔章集)〓IMF체제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우리가 추진해야 할 개혁의 원칙은 ‘민주적 시장경제 실현’이다. 이는 개발독재모델에 입각한 양적 팽창을 끝내고 새로운 시장경제체제에서 질적 성장으로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IMF관리체제 이후를 고려한 개혁의 3단계는 △IMF의 개혁요구 수용을 통한 외환위기 극복 △재벌개혁과 노동개혁을 통한 생산체제의 구조적 변화 △사회적 신뢰와 연대, 복지의 증진, 민주주의의 성숙, 경제 재도약으로 설정할 수 있다. 정치개혁은 새로운 민주적 시장경제체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개혁정책과 보수정책을 대변하는 주체세력들이 재정렬될 때 구조적인 재편이 가능해질 것이다.
▼토론(서울대 윤영관·尹永寬)〓경제개혁은 각 정치 세력간의 갈등을 불러올 수 있다. 현재의 노사정 합의는 노측과 사측 모두 다 불만을 가지고 있는 상태다. 김대중정권은 새로운 개혁지지 세력으로 그동안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중산층을 정치세력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