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발톱자국을 남기는 맹수들 같은 영역다툼, 야수의 눈길처럼 내리 꽂히는 끈끈한 눈길, 뻔뻔하게 분출되는 본능….
▼ 공간확보 경쟁 ▼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강남으로 가는 좌석버스안. 혼자 앉은 승객 11명 중 창쪽에 앉은 사람은 겨우 2명, 나머지는 모두 복도쪽. 새로 탄 승객들은 차마 창쪽으로 들어갈 엄두가 안나는지 뒤로 뒤로. 뒤늦게 탄 30대 남자가 눈을 감고 있는 40대초반 남자를 건너 창쪽 좌석으로 가려고 쭈뼜쭈뼜. 못마땅한듯한 표정으로 다리를 모아주는 40대 남자. 다섯 정류장후. 창쪽의 30대초반 남자가 내리려 한다. 반복되는 두 남자의 불유쾌한 접촉.
지하철도 비슷. 자리를 넓게 차지, 다른 사람이 파고들기엔 너무 좁은 반인(半人)분의 공간만 남겨두는 승객이 한칸에 두세명씩은 눈에 띈다. 혹은 거만하게 발을 꼬고 앉은 사람들. ‘다가오면 다친다(옷에 흙묻는다)’도도한 거부의 메시지에 부닥쳐 체념하는 여린 승객들. 매일 대중교통수단안에서 벌어지는 소리없는 갈등. 심리학자들은 “‘근접영역’(Intimate Zone)을 지키려는 욕심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근접영역은 사람과 사람간의 거리가 46㎝이내인 공간. 특히 15㎝이내는 연인 배우자 부모자식간이 아닌 타인이 들어올 경우 불쾌감과 경계심을 느끼게 되는 ‘접촉영역’(에드워드 홀 ‘Body Language’).
하지만 생판 처음 보는 타인과 접촉영역 안에서 부대낄 수밖에 없는 대중교통수단. ‘몸이 닿는 것이 싫어 가급적 넓은 영역을 확보하고픈 본능이 일어나는 좁은 공간’인 동시에 ‘남과 공유할 수밖에 없는 공공장소’다. 그 이중성에서 생기는 갈등을 최소화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본능을 적절히 억제하고 남을 배려하는 에티켓. 그러나 현실은?
▼ 무절제한 본능 발산 ▼
‘치마 입은 여자분은 뒷자리로 가세요. 남자 승객들이 천천히 타는 바람에 출발이 늦어짐. 여기는 술집이 아님.’
서울도심과 경기 의왕시를 오가는 한 좌석버스 입구 유리창에 지난해 여름 한 운전기사가 써붙인 안내문이다. 무례한 표현에 승객들이 받은 불쾌감을 별개로 하면 사실 이 문구가 터무니 없는 얘기는 아니다. 굳이 성추행범이 아니더라도 버스나 지하철안에서 노골적으로 끈적한 눈길을 보내는 남자가 한둘이 아닌 현실.
차창밖에 어둠이 내리면 밀림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걸까.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욕구를 발산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H운수 기사 김모씨(53). “밤늦게 손님이 적은 차를 몰다보면 남녀승객들의 지나친 행동에 모욕감을 느껴 차를 세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자유로변의 가로등은 툭하면 꺼져 있다. 이른바 ‘카섹스족’이 거리를 어둡게 하려고 돌을 던져 깨기 때문.
사실 기성세대는 입에 올리기조차 꺼리지만 도발적, 자극적인 것을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의 영향으로 젊은이들 사이에 카섹스족이 점점 늘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
‘쓰러졌을 때 일으켜 주는 것은 우정, 둘이 함께 쓰러지는 것은 사랑.’일본의 혼다자동차가 96년말 SMX(2천㏄급) 레저용차를 시판하며 내건 광고문구다. 좌석을 모두 젖히면 틈새나 튀어나온 부분이 거의 없는 대형 더블베드로 변신하는 실내….
도로 공용주차장 등 공공장소에서의 카섹스는 현행법상 ‘공연음란죄’. 구류나 벌금을 물리 수 있게 돼 있다. 하지만 사생활 간섭이란 반론이 만만치 않고 경찰도 적극단속에 어려운 점이 많다.
서울경찰청 김모경장(32). “일선파출소 근무 때 순찰 나가면 차내 퇴폐행위를 수시로 발견한다. 한 여자연예인은 너무 자주 걸려 아예 파출소 순경들이 모두 차번호를 외울 지경이었다. 범죄의심차량에 대한 검문검색 권한이 있으므로 검문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현장에서 훈계방면한다.”
액정TV로 음란비디오를 틀어주는 택시가 등장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올 지경으로 일그러진 우리의 차내 문화. 전문가들은 결국 ‘건전한 보통시민의 보이지 않는 압력’과 ‘타인을 배려하는 기본적 에티켓의 체화(體化)’만이 비틀린 차내 문화를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이라고 강조한다.
국제친절매너연구원(HMI) 여운걸소장. “우리사회는 위아래 사람에 대해선 예의가 깍듯한 동방예의지국이다. 그러나 양 옆, 즉 자신과 별 관계없는 타인에 대한 예의는 거의 미개인수준이다. 차내에서의 애정표현만해도 그렇다. 함께 사는 공동체에는 ‘사생활로 인정하고 고개를 돌려주는’ 시각뿐만 아니라 ‘후레자식’이라고 욕하는 시각, ‘훔쳐보려는’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 자신들의 사적(私的) 행동으로 남이 불쾌감을 받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는 자세가 절실하다. 어려서부터 타인에게 조금의 폐도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는 습성을 길러줘야 한다.”
〈이기홍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