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을 이리저리 휩쓸고 다니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 옷깃을 세우고 걸어가던 나는 무심코 길가에 버려진 인형을 밟았다. 한쪽 다리가 없는 인형이 발에 밟혀 배마저 쑥 들어간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깨끗이 씻은 뒤 내 방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올해로 환갑을 맞은 동화작가 이준연씨.
아직도 동화를 처음 쓰게 된 계기가 된 그 날을 잊지 못한다. 그로부터 37년. 교과서에 실린 작품과 각종 수상작 등 평생의 작업을 정리한 기념 작품집을 발간했다. ‘인형이 가져다준 편지’와 ‘나무를 심는 토끼들’(한국프뢰벨 펴냄).
소설가를 꿈꾸던 그가 인형을 밟게 된 것은 운명이었을까. 책상 위에 놓인 인형을 밤새 바라보던 그는 한없는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바닷가 오두막집, 병이 들어 친구를 애타게 찾는 소녀, 짓궂은 동생의 장난으로 버려진 인형, 찢어진 편지, 밤하늘의 아기별….
“옷이 다 떨어졌어요. 주머니도 구멍이 났고요. 편지가 빠져 버림 어떻게 하죠?”(바람에 실려 편지와 함께 주인을 다시 찾게 되는 공주 인형)
“음! 그래. 그럼 또 어떻게 하지? 할 수 없다. 내가 편지를 접어서 부러진 네 다리 구멍 속에다 넣어 줄게!”(아기별)
아기별은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으면서 편지를 곱게곱게 접어서 인형의 다리 구멍 속에다 넣어주었습니다.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선명한 묘사와 긴장감 있는 구성. 잘 짜여진 소설 같은 그의 동화는 ‘옛날 옛날에…’로 시작되는 기존 동화와는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결국 이듬해 이 작품으로 신춘문예에 입상했다.
어려서 홍역을 앓은 뒤 생긴 심각한 시각장애에다 늑막염 담석증 위암까지 숱한 병마와 싸우며 지낸 그의 인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원고지에 한쪽눈을 1∼2㎝정도 바싹 들이대고 칸을 크게 만든 특수 원고지에 굵은 사인펜으로 더듬더듬 써내려가는 그의 작업은 ‘인간 승리’에 가깝다.
지금까지 지어낸 창작동화가 장단편을 합쳐 총 8백여편. 시력의 장애가 오히려 맑은 동심과 상상력을 샘물처럼 쏟아낼 수 있게 하는 비밀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때문에 회갑을 맞은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수염난 아이’다.
새빨간 동백꽃이 피는 선운사, 누런 곡식들이 익어가는 벌판, 10리 밖에는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곳. 전북 고창이 그의 고향이다. 이때문인지 그의 동화는 대부분 농촌의 토속적인 생활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금동이 은동이 만석이 짝귀 점등이 순돌이 순님이 송이 분이…. 소쩍새 보리바람 여우고개 팽나무 도깨비연못 샘골 까치골…. 등장하는 주인공과 배경 모두 정감 어린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그의 자연에 대한 사랑은 과학과 물질만능주의에 빠져버린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인간성이 로봇(서양 도깨비)으로부터 지배를 받는 세상. 여기에 우리의 홍도깨비와 감골할아버지, 장뚱땅 삼형제가 로봇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데….(‘로봇나라 도깨비 대통령’ 92년 소년동아일보 연재).
“동화는 그 자체가 ‘아름다운 자연’입니다. 자연은 함께 조화를 이루며 순리대로 살죠. 동화를 쓴다는 것은 이런 아름다운 자연을 어린이의 마음에 심어주는 작업입니다.”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온 두딸 은경(29) 은하(22)씨. 시력이 좋지않은 아버지를 도와 글을 교정해주던 그들도 이제 아동문학의 길을 걷고 있다.
〈전승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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