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시인 김용택-안도현의 「동백찬송」

  • 입력 1998년 4월 6일 19시 15분


동백꽃 보러 간다. 고창 선운사로….

전주에 사는 시인 안도현(37), 섬진강가에서 초등학교 아이들 기르는 김용택(50). “봄되면 지리산으로 산수유 보러가자, 광양으로 매화 마중가자.” 겨우내 꽃구경 계획으로 마음 부풀었던 두사람.

그러나 정작 봄이 되니 꽃타령하기도 민망한 시절. 시인의 마음도 주눅들었다. 허나 4월이 가기전 선운사 동백은 보아야하리.

“형은 언제 선운사 처음 와 봤어요?”

단풍나무는 분홍색으로, 느티나무는 연초록빛으로 새순을 틔워 산색(山色)이 흐드러진 선운사 입구. 미당 서정주 시비(詩碑)에 새겨진 ‘선운사동구(洞口)’를 읽으며 “참 좋다, 좋아.” 새삼스레 탄복하는 김용택에게 안도현이 묻는다.

“나? 그때 그 여자한테 버림받고…. 참말이랑께. 도랑물이 어떻게나 시린지 이를 악물고 맨발로 건너는데….”

‘…그까짓 사랑때문에/그까짓 여자때문에/다시는 울지말자/다시는 울지말자/눈물을 감추다가/동백꽃 붉게 터지는/선운사 뒤안에 가서/엉엉 울었다’(김용택 ‘선운사 동백꽃’)

‘선운사 동백’은 동백이 아니라 춘백(春柏)이다. 겨울 끝자락에 꽃망울을 터뜨렸던 여수 오동도 동백꽃이 일제히 낙화하는 4월, 선운사 동백꽃은 비로소 활짝 꽃망울을 터뜨린다. 반짝이는 잎새 때문에 먼발치에서 보면 흡사 은빛띠를 두른듯한 2㎞의 동백군락.

그러나 동백꽃은 장미처럼 화려하지도, 백합처럼 우아하지도 않다.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같이 흐벅지게 진홍빛으로 타 오른다. 일찍이 미당은 이 꽃의 됨됨이를 두고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겨울날에 동백꽃은 피어 말하네―/“에잇 쌍!에잇 쌍! 어쩐 말이냐?/진사딸도 참봉딸도 못 되었지만/피기사 왕창이는 한번 펴야지!”…’(‘동백꽃타령’ 중)

그러나 동백꽃 지는 것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이 꽃 두고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이파리 하나하나가 바람에 날리는 것이 아니라 뎅겅 목이 부러지듯 순식간에 꽃몸이 통째로 낙화하는 그 격정. 떨어진 꽃 한송이를 손바닥에 놓으며 두 시인이 하는 말.

“말릴 사이도 없이 이렇게 제 목을 끊어 툭툭 떨어지니…. 미치지요.”

어느덧 도솔암 가는 길 사이로 해가 기운다. 선운사에서 제일 먼저 동백꽃이 핀다는 암자. 그리고 다시 산문 입구로 되돌아 나오는 길. 동백 보러 가느라 눈길도 안 주었던 절마당에는 수선화 벚꽃 개나리 진달래가 한창이다.

“나는 동백꽃 피는 게 그냥 뒷간에서 힘주는 것하고 같은 이치인 것 같던데….” 혼자 고시랑대는 안도현에게 못들은 척 김용택이 거는 말.

“도현아. 다음주에는 진메(전북 임실군 운암면) 우리집 가서 돌미나리랑 취 돌나물 쑥부쟁이 새파랗게 한 상 뜯어놓고 된장 푹푹 찍어서 밥 먹을까?”

우리가 왜 꽃 보러 왔느냐고? 애기똥풀한테 물어보라지.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얼마나 서운했을까요//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안도현 ‘애기똥풀’)

〈고창 선운사〓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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