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흘리고 불타오르는 조국에서 쫓겨나 망명지에서 ‘내 조국 칠레를 돌아보라’는 조난신호를 띄워올려야했던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56). 노벨상 수상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등과 더불어 남미문학의 대표작가로 꼽히는 그가 민족문학작가회의(이사장 신경림)초청으로 1일 내한했다. 방한에 때맞추어 그의 단편소설집 ‘우리집에 불났어’와 시집 ‘산띠아고에서의 마지막 왈츠’(창작과 비평사)가 번역돼 굴곡많은 칠레 현대사와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역정을 가늠케 한다.
도르프만은 한국인에게 전혀 낯선 인물이 아니다. 그의 희곡 ‘죽음과 소녀’가 이미 92년 국내 초연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데다가 같은 작품을 로만 폴란스키가 영화화한 ‘진실’도 개봉됐기 때문이다.
‘죽음과 소녀’(91년작)는 대학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다 성고문당했던 여인 파울리나가 성고문범의 목소리를 가진 의사 로베르토와 우연히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파울리나는 로베르토를 묶고 총으로 위협하며 “진실을 말하라”고 강요하지만 인권변호사인 남편 헤라르도는 그를 만류한다. 파울리나의 분노는 남편에게 쏟아진다.
“죽은 사람들의 문제만 허용된 범위 안에서 밝히는게 당신이 말하는 정의인가요?”
도르프만은 결코 고통받는 자의 눈으로만 부당한 현실을 보지 않는다. 때로는 검열관이나 학살세력을 지지하는 우매한 민중이 그의 작품의 주인공이며 파울리나의 남편처럼 민주인사도 회의의 대상이다.
“작가의 의무는 정의가 없다고 외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각적인 시선으로 정의부재의 상황이 일상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를 증언해야 합니다.”
도르프만은 73년 군부쿠데타로 좌파 아옌데정권이 무너진 뒤 칠레를 떠났다. 아옌데정부의 문화특보이자 진보적 대학교수이며 작가겸 평론가로서 ‘도날드덕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등의 비평서로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적 지배를 비판해온 그는 신군부의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망명 이후 유럽과 미국을 떠돌던 그는 85년 이후 미국 듀크대 교수로 정착했다.
스페인어와 영어를 두개의 모국어로 구사하는 그는 ‘남미인의 정체성’ ‘억압받는 칠레 민중의 삶’을 소설 시 희곡 영화각본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형상화해 왔다. 그의 작품들은 은밀히 행해지는 살해 고문 언론통제 등 칠레의 상황을 인간성 내면에 깃든 보편적인 문제로 호소해 국경을 넘어서까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그는 방한 이전부터 한국인에 대해 “억압 한 가운데 있는 국민은 오히려 그렇지 않은 나라의 국민보다 억압에 대해 침묵하려 한다. 그런 점에서 광주문제의 진실을 밝히려 노력해온 한국인들의 자세는 놀랄 만한 것”이라며 경의를 표해왔다. 도르프만은 4일 오후4시 서울대, 6일 오후6시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살아남기의 언어’를 주제로 강연한다. 극단 미추(0351―879―3100)는 그의 신작희곡 ‘독자’의 워크숍 공연을 4, 5일과 9, 10일 경기 양주군 미추산방에서 갖는다. 02―313―1486
〈정은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