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원초적 기쁨인 ‘먹는 즐거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의 ‘좋은 맛’은 커다란 문화충돌 안에서 탄생하고 있다. 이른바 맛의 혼합, 미각 퓨전(fusion)의 와중에 새로운 맛이 ‘좋은 맛’으로 승인되고 있는 것. 한국음식은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선입견을 깨기 위해 먼저 들여다봐야 할 곳이 있다.
4대 PC통신에 개설된 식도락동호회. 천리안 식도락동호회 ‘go eat’에 최근 3개월간 실린 내용 중 조회수로 선두다툼을 하는 요리를 꼽아보면 ‘치즈라면’과‘딸기 맛있게 먹기’.
치즈라면은 말 그대로 라면에 치즈를 얹어서 녹여 먹는 것. 딸기 맛있게 먹는 법을 소개한 사람은 설탕 대신 프림가루를 딸기 위에 솔솔 뿌리라고 권한다.
젊은 독자를 겨냥하는 요리책도 보수적인 입맛의 소유자들이 보기에는 장난인가 요리인가 싶을 만큼 문화와 문화를 넘나드는 실험적인 요리공식을 소개하고 있다.
TV프로그램의 요리코너를 책으로 엮은 ‘맞아맞아 참참참’의 인기메뉴는 ‘김치스파게티’. 한국인 유학생들이 개발했다는 이 메뉴는 소금 젓갈 고춧가루 마늘을 넣고 맛을 낸 김치와 스파게티면에 케첩 간장 설탕 핫소스 치즈를 얹어 이탈리아와 한국, 스파게티와 비빔국수를 혼합한 새로운 요리.
맛의 퓨전에 유난히 적극적이고 용감무쌍한 실험자들은 10∼30대 젊은층. 컴퓨터통신의 주 사용자층과도 일치하는 이들은 80년대 이후 호황을 누린 외식산업의 수혜자들이다.
쌀로 쑨 암죽 대신 상품으로 생산된 이유식을 맛보았고 “유아기에 학습된 것 중 가장 오래 향수의 대상이 되는 음식의 맛”(피에르 부르디외·프랑스 사회학자)에 관해서도 된장찌개와 김치 스파게티 피자 햄버거 자장면 일식우동 초밥 나초(멕시코음식)를 제한없이 넘나들었던 세대들.
이 세대는 자식들의 식습관에도 개방적이다. 일곱살 세살배기 두 아이를 키우는 주부 이경혜씨(31·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아이들이 케첩이나 스파게티 소스에 밥을 비벼먹든, 된장찌개에 비벼먹든 어느 한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뭐든지 한끼를 맛있게 잘 먹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국경없는 시대에 김치와 고추장이 없으면 밥을 못먹는 불편한 식습관을 길러줄 필요는 없다”고 확언한다.
맛의 퓨전은 이미 지금의 중장년층으로부터 잉태됐다. 전통요리연구가 한복선씨는 “일본음식과 해방 뒤 전쟁구호물자인 꿀꿀이죽 설탕의 대량공급으로 한국인은 과거 친숙하지 않았던 단맛과 감칠맛에 깊이 빠져든 대신 짠맛에 대한 선호도가 낮아졌다”고 분석한다. 그런 미각의 변화가 차세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맛의 퓨전으로 진전됐다는 것.
맛의 퓨전으로 결과되는 ‘새로운 좋은 맛’은 어떤 것일까. 요리전문가들은 “뒷맛이 담백하고 깔끔한 쪽을 점점 더 선호하지만 간장 맛에 대한 집착이 완강하기 때문에 간장맛은 기본으로 깔리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밥상에는 국과 찌개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장난처럼 여겨지는 맛의 퓨전. 때로 그것은 “정말 맛있다”는 만족감보다 ‘문화적인 자기표현방식’이다. 라면에 치즈를 넣어 먹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부모에게 “치즈라면보다 개고기가 훨씬 이상하다”고 떼지어 맞서는 젊은 세대. 저명한 음식인류학자 시드니 민츠가 일찍이 그러지 않았던가.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행위”(‘설탕과 권력’중)라고.
〈정은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