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심포지엄은 국내외 사회 정치학자 20여명이 참가, 정치적 틀을 뛰어넘어 인권 신장이라는 측면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을 새롭게 해석해본 진지하고도 열띤 토론의 자리였다. 5·18기념재단 주최, 한국사회학회 주관, 동아일보사 후원.
▼세계화와 사회운동(알랭 투렌·프랑스 사회과학원)〓정치 경제 중심의 세계화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세계화 시대에 있어 중요한 것은 정치 경제의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여성문제 환경문제와 같은 전지구적 관심사항이기 때문이다.
좌파 우파의 색채를 띠는 정당 운동은 이제 영향력이 없다. 즉 사회 갈등을 해결하는 주체는 정치적 세력이 아니라 의사 간호사 교사 집없는 사람 실업자 이민자 등 다양하고도 평범한 세력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본 국민주권과 승인투쟁(한상진·서울대)〓광주 민주화운동은 새로운 인권 개념을 탄생시켰다. 80년 5월 광주에서 공권력이 물러난 뒤 일주일간의 해방기간(5월21∼27일)은 우리 역사상 처음 시도해봤던 공동체 자치 경험이었다.인권운동 차원에서 본 광주 민주화운동은 우선 자기 정체성 찾기(승인투쟁)라 할 수 있다. 해방 기간은 또 잠시나마 국민주권이 실현된 장이었다. 공권력이 물러갔어도 시민들은 무장폭력과 혼란 무질서가 아니라 동지애와 보살핌으로 질서를 지키고 자발적 참여와 토론으로 공동의 의사를 결정하는 소중한 민주주의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국가에 대항하는 시민사회:5·18의 자유해방주의적 해석(김성국·부산대)〓5·18은 기층 민중과 노동자 계급이 주도한 민중항쟁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초적 폭력을 거부하는 초계급적 시민항쟁으로 파악해야 한다.
국가는 태생적으로 폭력을 동반한다. 이것은 민주주의 선진국도 마찬가지다. 삼권분립이라는 제도는 국가의 폭력을 단순히 분리해놨을 뿐이다. 민주주의란 국가의 폭력성을 제거해나가는 과정이다.
5·18 당시 ‘해방 광주’는 하나의 시민 공동체였다. ‘국가 없이도, 즉 무정부 상태에서도 질서는 유지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5·18의 죽음과 어둠을 넘어 우리가 나아가야할 길은 자유 해방 사회임이 명백해진다.
▼권력 투쟁과 해방 쟁취로서의 5·18 광주 민주화운동(배동인·강원대)〓역사의 동력(動力)은 인간의 권력 지향과 권력 투쟁을 통한 해방 지향에서 비롯한다. 5·18은 국민을 대신한 광주 시민과 폭력 정권과의 극한 투쟁이자 폭력에 대한 정당방위였다.
5·18은 미완의 해방이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법적 심판은 5·18을 완성하기 위한 첫걸음에 불과했다. 그런데 현정권은 그들을 사면했다. 그런 의미에서 5·18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5·18은 광주라는 한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인류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 실현의 본보기다. 광주는 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 지구화와 지방화가 만나는 곳이다.
▼5·18에 대한 의미 구성과 재해석의 변화 과정(김두식·대구대)〓80년 5월 광주는 평등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존재했다. 기득권 세력과 재야 운동권간의 갈등, 학생과 투쟁 당사자인 기층 민중간의 갈등, 항쟁파와 수습파간의 갈등 등. 평등을 갈구하던 민중들은 학생 지식인 명망가와 자신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깊은 골이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결국 최대의 피해자는 기층 민중이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도 5·18은 광주를 결속시켰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것은 5·18을 ‘광주만의 5·18’로 국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폭력과 사랑의 변증법:5·18 민중항쟁과 절대 공동체의 등장(최정운·서울대)〓5·18 당시 광주 해방구는 사랑이 충만한 공동체였다. 그곳에서 모든 사람들은 존엄한 인간으로 대접 받았다. 그 순간 투쟁은 신명나는 자기 창조였다. 그리고 그 값을 하기 위해 그들은 더욱 열심히 싸웠다. 그들만의 공동체에 생명력을 부여하기 위해 총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총을 잡는 순간 시위대는 불안했고 공동체 내부에 숨어 있던 계급을 발견했다. 그로 인해 그 공동체는 오랫동안 지속될 수가 없었다.광주라는 공간은 한국의 역사, 한국의 현실을 상징한다.
〈이광표·전승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