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후 각박해진 주변이야기]「불신 증후군」만연

  • 입력 1998년 5월 17일 19시 21분


[아침]

▼집앞〓출근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공무원 박모씨(39·서울 목동아파트10단지). 승강기 옆집(복도식 아파트) 문앞에 있는 신문1면을 잠깐 들여다봤다. 집에서 보는 신문에 자신이 관여해온 정책 관련 기사가 1면에 올라 있어 다른 신문에선 어떤 크기로 처리했는지 궁금했기 때문. 기다렸다는 듯 열리는 현관문. 낯익은 아주머니가 얼굴을 쏙 내밀더니 “왜 자꾸 신문이 없어지나 했더니…”라며 경멸섞인 눈빛을 던지고 문을 꽝.

▼출근길〓서울 신월동에서 강남으로 차를 몰고 출근하던 회사원 김정태씨(43). 기름 3만원어치(28ℓ)를 넣고 2백㎞밖에 안뛰었는데 연료부족표시등이 깜박. 차에 표시된 연비는 1ℓ에 13.8㎞인데(96년 감사원 감사결과 13개 차종 중 8개 차종의 표시연비가 실제와 20%가량, ℓ당 최고 5㎞ 차이). 봉천동에서 기름을 넣고 신용카드를 줬더니 “현금만 받는다”며 거절.

올들어 편의점 영화관에서도 수표나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 곳이 한둘이 아니다. 서울 제기동의 한 주유소는 자정이후엔 선불을 받는다. 가득 채울 경우엔 종업원이 계기판을 보고 들어갈 휘발유 양을 미리 추산, 일단 돈을 받은 뒤 차액을 받거나 돌려준다. 주유소측은 “2주에 한두대 꼴로 기름만 넣고 도망치는 차가 생겨 고육책을 냈다”고.

[낮]

▼거리〓거래처에 가던 M산업 최모씨(36)는 난생처음 ‘형무소 택시’를 탔다. 승객이 안에선 문을 못열게 뒷문 양쪽 손잡이를 뜯어내고 푸른색 테이프로 봉한 것. 운전사가 레버를 당겨야 문이 열린다. 개인택시 운전사 황모씨의 해명. “술취한 승객끼리 다투다 문을 열고 뛰어내리는가 하면 요금을 안내고 도망치는 경우도 있다.”

▼업소〓정수리에 탈모가 시작된 김수형씨(38·D정보통신). 대형서점 몇곳에 들렀더니 천장이 다 거울. 대형 슈퍼에 들어가도 거울과 무인카메라 천지다. 서울 강남구청 인근 K슈퍼는 주인이 카운터에 앉은 채 진열대 너머를 볼 수 있도록 구석구석에 거울을 배치. 실내가 한눈에 보이는 작은 가게인 고려대 정문 앞의 S슈퍼 주인아주머니조차 3월 용산전자상가에서 무인카메라를 직접 구입해 설치했다.

삼성생명 부설 사회정신건강연구소 박현선박사. “서구사회는 기본적으로 계약과 문건에 의해 이뤄지는 불신사회에서 출발, 신용사회에 도달했다. 우리는 인간관계나 안면을 통해 거래가 이뤄지는 ‘정의적 사회’에서 ‘계약적 신용사회’로 가는 과도기에 IMF한파를 맞아 정의도, 계약에 의한 신용도 사라진 불신상태를 맞고 있다.”

[밤]

▼집앞 골목〓밤12시경, 야근을 마친 김태현씨(33·K개발대리). 서울 합정동에서 좌석버스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걸었다. 20여m 앞에 가는 한 아가씨. 흘끗 돌아보더니 걸음을 점점 빨리한다. 갈림길을 두개쯤 지났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방향. 아가씨가 갑자기 도망치듯 뛰어간다. 김씨는 이해는 됐지만 치한취급을 받은 것 같아 불쾌했다.

LG커뮤니카토피아연구소 김종길박사(사회학).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려워질수록 개인이 믿을 수 있는 ‘우리(We)집단’의 규모는 극히 작아지고 소수의 ‘우리’를 제외한 ‘외부(Other)집단’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극도로 높아진다.”

▼사이버공간〓남재혁씨(26)는 PC통신 대화방에서는 여자로 행세. 친구들과 여러개의 ID를 돌려가며 쓴다. 채팅상대의 성별이나 직업을 절대 불신.

LG의 김박사. “익명의 바다인 사이버공간은 본질적으로 불신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서구는 신용사회가 정착된 대신 정보화에 따른 사이버불신이 팽배하고 있다. 우리는 ‘전통적 불신+산업화에 따른 불신+경제난에 의한 불신+정보화사회 도래에 따른 불신’이 뒤섞이는 상태다.”

▼집안〓쌍용그룹에서 명예퇴직한 김모씨(45). “중학생인 딸들이 ‘아빠 믿다가는 대학도 못가겠다’고 수군댔다. 그후론 애들이 사춘기여서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걸 이해하면서도 이상하게 미덥지 않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남자와 결혼한 김모씨. 결혼전 김씨를 따라다닌 남자후배와의 관계를 의심해온 남편이 첫날밤 김씨의 혈흔을 확인하고도 “몰래 옷핀으로 찌른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며 가족상담소에 하소연.

부부관계 상담창구엔 IMF사태 이후 배우자를 의심하는 상담이 10%이상 증가. 이윤수비뇨기과남성클리닉원장은 “아내에 대한 의심이 발기장애 등 성능력 저하로 이어져 고민하는 남자 환자가 적지 않다”고 전한다.

LG의 김박사. “사회가 빡빡해지면서 개인이 품고 있는 불신의 양과 종류가 급증하고 이것이 매스컴과 PC통신 등에 의해 급속도로 서로의 머릿속으로 감염되고 있다.”

〈이기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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