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들 형석(4)을 안고 분만실 앞 소파에서 아내의 둘째아이 출산을 기다리던 회사원 이지훈씨(35). 간호사는 ‘낭보’로 전했지만 이씨는 떨떠름한 표정.
30분 뒤 입원실에서 마주한 아내. 초췌한 얼굴에 미안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여보, 미안해…. 또 아들이네.” “미안하긴, 잘 키우면 되지….” 아내를 위로하느라 한마디했지만 장모에게 형석이를 맡겨놓고 병원을 나간 이씨.‘딸 없는 아버지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홀로 소주잔을 기울였다.
홍영재산부인과 홍원장의 얘기. “90년대 중반이후 아들만을 원하는 부모는 크게 줄었습니다. ‘대를 잇는데’는 아들 하나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둘째는 거의 100% 딸을 원합니다.”
맏며느리로 딸만 둘을 낳은 김정미씨(36). 얼마전까지 일주일에 4, 5번씩 ‘아들 가질 것’을 독촉하던 시어머니의 전화가 뜸해진 이유를 최근에 알았다.
“암에 걸린 친구 병문안을 갔더니 아들만 셋을 둔 그 친구가 신세를 한탄하더라. ‘열 아들 소용없더라’고.” 나이들어 도움이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는 건 딸밖에 없더라는 얘기에 느낀 바가 있었다는 시어머니의 고백.
아들만 있는 부모들. 이전까지 ‘딸 하나 있었으면’하는 생각이 ‘가진 자의 오만’이었다면 요즘은 신세대 부모들을 중심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실제로 느끼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홍원장과 박진생정신과의원의 박원장은 아이를 두명 키운다고 할 때 ‘바람직한 조합’이 세대에 따라 다음과 같이 바뀌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한다.
▼구세대 부모
△1순위〓아들 둘 △2순위〓아들 하나, 딸하나 △3순위〓딸 둘
▼신세대부모
△1순위〓아들 하나, 딸 하나 △2순위〓아들 둘 △3순위〓딸 둘
▼‘진짜’신세대 부모
△1순위〓딸 하나, 아들 하나 △2순위〓딸 둘 △3순위〓아들 둘.
딸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박원장의 성장환경 관련 설명.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거나 형제가 많아 ‘엄마’를 상대로 애정경쟁을 벌이며 어린 시절을 보낸 젊은 아빠들이 특히 딸을 선호한다.”
다음은 그의 사회학적 분석.
“70, 80년대에 대학생활을 하며 ‘기성의 권위’에 저항했던 세대는 혈통주의 가부장제같은 사고의 틀에서 자유로워 남아선호의 부담에서 쉽게 벗어난다. 젊은 부모들이 삶을 자기중심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키우는 재미’와 ‘노후 만족도’가 높은 딸을 선호하기도 한다.”
남녀의 출생성비에도 변화의 조짐. 통계청에 따르면 96년 출생성비는 여아 1백명당 남아 1백11.7명. 93년이후 조금씩 낮아지는 추세.
보건사회연구원의 조남훈부원장(인구학자). “아직까지 전체 부모의 25%정도가 ‘아들은 꼭 있어야 한다’고 응답할 만큼 남아선호가 강하다. 자녀 한명을 둘 때 딸을 원하는 비율이 60% 이상인 일본과는 큰 차이다. 신세대부부가 딸을 선호하더라도 부모세대의 ‘남아선호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자이기 때문에’ 손해보는 영역이 사라져야 ‘딸’에 대한 선호도 자신있게 표출될 것이다.”
〈박중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