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낙원으로의 이민’이라는 말에 속아 조국땅을 떠난 지 93년. 지구 반대편 척박한 타국땅 묵서가(墨西哥·멕시코)에서 짐승보다 못한 노예로 착취 당하다 숨진 조선인의 피맺힌 울부짖음이 거대한 합창으로 다가온다.
6월2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르는 서울예술단의 뮤지컬 ‘애니깽’은 조선이 망국으로 치닫던 1905년 국제노예상과 일본인 거간꾼에 속아 멕시코로 끌려갔던 조선인의 넋을 달래는 한바탕 진혼굿이다.
작가 김상열씨가 이 작품에 착안한 것은 88년. 몽골리안의 이동경로를 취재여행중이던 그는 멕시코시티에서 “왕조 몰락기에 한국노예이민이 있었다”는 교민의 증언을 들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일당 35전” “4년만 일하면 자유의 몸이 된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멕시코행 배를 탔던 조선남녀 1천33명이 강제정착한 곳은 유카탄반도의 메리다. 주어진 일은 애니깽농장에서 카펫의 원료가 되는 용설란, 애니깽 잎을 자르는 것이었다. 하루 1천개의 잎을 따지 못하면 채찍질을 당하고 도망치다 발각되면 처형당하는 참혹한 현실에 한사람 한사람 숨져갔던 이민 1세대….
그때 작가를 움직인 한 이민2세대의 어렴풋한 기억이 있었다.
“…조선 노예 네 사람이 견디다 못해 조선임금께 참상을 알리겠다고 농장을 탈출했지. 뱃길을 잘못 잡아 쿠바로 갔다가…거기서 10년을 넘게 살다 샌프란시스코로 갔다는 거야….”
뮤지컬 ‘애니깽’은 이 네 사람의 수십년에 걸친 귀향투쟁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공연개막일을 앞두고 막바지연습이 한창인 서울예술단의 연습장. 관객들마저도 무대위 농장감독의 소름끼치는 채찍소리에 전율하며 “저렇게 당하고만 있다니…. 바보같은 나라, 바보같은 백성이다”라고 진저리를 칠 1막 마지막 부분 극적 반전이 시작된다. “단 몇사람이라도 살아서 조국에 돌아가 상감께 이 억울한 일을 고해야 한다”며 이민자들은 뜻을 모으고 용감한 네 사람이 목숨 건 전령을 자청한다.
음악을 맡은 서울방송 관현악단장 김정택(작곡가)은 ‘아뢰옵니다 상감마마’ ‘내가 죽어도 나는 갑니다’ 등 장중한 분위기의 창작곡 외에 ‘키사스 키사스’ ‘베사메무초’ 등 귀에 익숙한 라틴음악들을 춤과 함께 삽입,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2시간 20여분의 공연에 쉬어갈 틈을 마련했다.
뮤지컬의 마지막. 조국을 떠난지 25년만에 백발 성성한 두 형제만 샌프란시스코에서 조국행 밀항선을 타지만 돌아온 조국땅에는 이미 ‘조선’도 ‘임금’도 없다.
“거짓말이에유. 임금님을 만나게 해줘유…이 애니깽가시를 보여드리려구 이십오년을 되돌아 왔어유”라고 절규하는 형제. 그들 앞에 “가련한 백성들아…살아왔으니 그대들이 이긴 것이다. 이 버림받은 백성들아!”라고 고개를 떨구는 망국의 외무대신. 칠흙같은 어둠 속으로 울려퍼지는 60명 단원들의 진혼가….
“애니깽 가시는 지금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단지 애니깽에서 국제통화기금(IMF)으로 바뀐 것 뿐. 나라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백성들이 허위허위 조국을 찾아왔듯이 이번 시련을 이길 사람들도 이름없는 국민들일 것이다.”(작가 김상열)
공연은 6월2일 오후7시반 3∼5일 오후4시 7시반 6,7일 오후3시 6시. 3∼5일 공연수익금은 전액 실직자를 위한 기금으로 기부된다.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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