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법 학자’ ‘최연소 주교’로 널리 알려진 정대주교는 ‘정중동(靜中動)’의 표상. 과묵 원만하고 소탈하면서도 일처리에 있어선 늘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정대주교는 3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친가 외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집안. 어머니는 ‘아들이 주교가 되는’ 태몽을 꾸었을 정도.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광복이 되던 해, 마르크스 사상을 접한 것.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마르크스 유물론 사이에서의 갈등은 중학 2년생에게는 너무 벅찬 것이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이듬해 ‘영혼’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가 사제의 길을 가기로 마음 먹은 것도 그 무렵.
그러나 혼자이신 어머니께 그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 50년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다. 곧바로 6·25가 났고 전란의 와중에서 그는 또다른 믿음을 얻어 성신대(지금의 가톨릭대)에 들어갔다. 61년 사제서품을 받고 70년엔 39세의 나이로 최연소 주교서품을 받았다. 당시 보도진이 몰려가 소감을 묻자 정주교의 어머니는 “감사, 감사, 감사”란 세 마디를 하고 기절할 만큼 감격적인 일이었다.
그 어머니가 “필요한 사람에게 안구를 기증하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은 96년. 당시 정주교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두 눈을 꺼내는 수술 현장을 끝까지 지켜보며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효심을 다했다. 이같은 그의 효심은 신앙적 믿음과 함께 사제로서의 사명을 다하는데 밑거름이 되어왔다고 주위에선 말한다.
〈이광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