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이옥순지음 「인도여자에게 마침표는 없다』

  • 입력 1998년 6월 4일 22시 12분


“아줌마, 한 푼만 줘요.”

델리의 복잡한 교차로에서 땟국이 줄줄 흐르는 거지 아이가 한 임산부를 좇아가며 구걸을 하고 있다. “아줌만 꼭 아들을 낳을 거예요. 아들이요….”

거지 아이는 뒤뚱거리며 걷는 임산부를 악착같이 뒤따랐다. 임산부가 마지못해 동전 한 닢을 내던지자 실망한 거지 아이. 그 등뒤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에이,딸이나 낳아라!”

이옥순교수(숭실대)의 ‘인도여자에게 마침표는 없다’(사과나무 펴냄).

갠지스강 만큼이나 깊고도 오랜 인도. 그 켜켜이 쌓인 복잡하고 허다한 사연 중에서 인도 여성의 문제만을 끄집어냈다.

장안의 화제가 됐던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에 이은 두번째 인도문화 에세이. 가벼운 터치로 씌여진 글들.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그네들의 삶의 무게를 헤아린다.

전세계 여성의 5분의 1, 인도여성의 삶은 이 세상 모든 여성이 풀어야 할 숙제를 던진다. 인도에서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인도에서 여자 아이는 열 명중 한 명꼴로 태어나는 즉시 살해된다. 원치않는 딸을 낳은 어머니가 젖은 수건으로 아이의 얼굴을 덮거나 베개로 눌러 죽인다. 해마다 1백만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소리없이 사라진다. ‘신이여, 제게 사내 아이를 주고 다른 이에게 딸을 주세요…’.

여자는 남편이 죽으면 여승처럼 머리를 빡빡 깎고 주홍색 옷을 걸치지 않으면 안된다. “나, 이런 여자에요”라고 광고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남편이 죽으면 그 화장더미의 불길 속에 과부를 내던지는 ‘사티제도’도 있다. ‘침대에서 편히 잠자는 홀어미는 남편의 영혼을 지옥으로 보낸다….’

제도화된 ‘성(性)착취’. 남편이 군대에 가거나 멀리 외지로 떠나 있는 동안 시동생이나 심지어 시아버지는 여자를 성적으로 공유한다. ‘남자와 집은 부동산이지만 여자는 동산이다….’

더 설명이 필요한가. ‘여자는 돌로 만들어졌다’는데도? ‘아들을 못낳은 여자는 진흙만도 못하다’는데도?

그런데도 고대 마누법전은 ‘여성의 몸은 신성하기 때문에 꽃으로라도 때려서는 안된다’고 설파하고 있으니, 진리란 얼마나 역설적인가!

물론 인도 여성들이 다 죽어 지내는 건 아니다.

‘늙은 여성 내각에 있는 유일한 남성 각료’라던 인디라 간디 전총리. 또 세계 유수한 언론 앞에서 민소매 티셔츠 차림으로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외쳤던 작가 아룬다티 로이.

뿐인가.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 스물두명의 ‘그곳’에 차가운 총알을 선사했던 ‘밴디트 퀸’ 풀란 데비.

그리고 저 유명한 ‘칩코 운동’을 보라.

조용하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보통 여자들의 힘이 강물처럼 흐른다.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자신의 여성성과 모성(母性)을 인간해방과 생태보호의 큰 뜻으로 이어가는 거대한 물줄기.

1973년 히말라야의 산악지방.

물푸레나무의 벌목권을 얻은 외지 사업가가 일꾼들을 몰고 왔다. 숲을 지키려는 동네 아낙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치자 일단 후퇴. 그리고 다음날 무장경찰들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여자들은 한 사람이 한 그루씩 나무를 꼭 껴안았다. 마치 아기를 감싸안듯이.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의 나무를 끌어안자. 베어 쓰러지지 않도록….’

남자들은 결국 빈손으로 산을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껴안는다’라는 뜻의 칩코(chipko)는 환경운동의 대명사가 됐다.

인도여성에게 현실은 말할 수 없이 참담하다. 하지만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네들의 삶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변화의 물결 속에서 소리없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인도 여성의 삶은 마침표가 없다…”고.그리고인도여성들에게,아니 이 세계 모든 여성들에게 숫타니경의 한 대목을 들려준다.

‘물 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 번 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모든 괴로움의 매듭을 끊어버리고/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기우기자〉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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