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된 대국장 분위기를 구수한 농담으로 곧잘 풀어주는 왕년의 ‘국수’ 윤기현(尹奇鉉)9단이 최근 자주 하는 말이다.
‘창호답다’‘창호답지 않다’란 물론 기풍(棋風)을 일컫는다. 빈 바둑판에 검은돌 흰돌이 놓이면서부터 계가를 하기까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쉴 새없이 요동치는 한 판의 바둑. 거기에 투영된 반상(盤上)의 경영철학, 그 기풍 말이다.
이창호9단의 기풍에 관해 ‘두터운 바둑’ ‘기다리는 바둑’ ‘특징이 없다’ ‘신비로움이 없다’ ‘무기풍(無棋風)이 기풍’이라고들 한다.
프로입단 직후 바둑계의 고수(高手)를 차례로 뉘여갔던 공포의 저단(低段). 그렇지만 누구도 소년 이창호의 ‘기풍’을 말하지 않았다. ‘바둑계의 풍상(風霜)을 겪은 이한테나 어울리지, 성적 좀 좋다고 풋내기한테 기풍이란 말이 가당찮은가.’그런 생각이었다.
대신 바둑계는 누구를 닮았는지에만 열중했다. 린하이펑(林海峰)9단을 닮았다는 평이었다. 자잘한 일에 신경 쓰지 않고 바둑연구에만 몰두하는 진지한 태도, 국세(局勢)가 어떻건 들뜨지 않는 놀라운 침착성, 강한 끈기 그리고 듬직한 체격까지 빼닮았다고 했다. 한마디로 두터운 바둑이었다.
그런데 린하이펑을 당당히 꺾고 세계챔피언이 되고부터는 ‘닮았다’는 말은 사라졌다. 분명 초기 이창호의 바둑은 ‘두터운 바둑’이었지만 윤기현9단의 말처럼 현재는 상당히 달라졌다.
현재까지 이창호 바둑의 흐름은 3가지 패턴을 보인다.
첫째는 86년 입단후 90년 국수위를 차지할 무렵까지의 두텁고 안전한 바둑.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바둑으로 누구도 따라 오지 못할 높은 승률을 기록했다.
둘째는 92년 동양증권배 세계대회 우승을 계기로 두드러진 경향으로, 두터움을 바탕으로 한 실리형 바둑. 두터움과 실리를 함께 갖춘 기풍. 어찌보면 이건 기풍이 아니다. 평범한 바둑이나 결과가 좋은 바둑이었을 뿐이었다.
현재는 두터움을 배경으로 한 공격형 바둑. 이창호9단은 얼마전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세계 최고의 공격수’란 별명을 가진 유창혁을 거세게 밀어 부치며 우승했다.
정치학 박사이자 프로4단인 문용직(文容直)도 학자답게 꼼꼼한 통계를 통해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는 이창호의 소비시간을 계산해
△88∼89년 상대보다 많은 시기
△90∼95년 상대와 비슷한 시기
△96년 이후 상대보다 짧은 시기로 나눈다.
이창호 바둑의 3가지 패턴과 거의 일치한다.
이런 변화를 거치기는 했지만 이창호9단의 바둑이 본질적으로 ‘두텁다’는 것은 변함없다.
세상에서 가장 두터운 바둑은 어떻게 나왔을까. 세가지 요인을 꼽을 수 있다.
첫째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유달리 큰 체격으로 매사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던 점. 전주교대 부속초등학교 입학 당시 근무했던 한 여교사는 이렇게 회고한다. “선 채로 운동화 끈을 맬 수 없을 만큼 체격이 컸어요.비만에 가까왔기에 행동이 너무 느려 운동부에 가도록 했지요.”
싸움을 피하면서도 두텁게 두어 나간 기풍의 둘째 배경은 남다른 가족애 속에 바둑을 배운 환경이다. 아홉살에 고향을 떠날 때 까지 이창호는 이시계점 3층에서 ‘바둑 잘 두는 손자’를 자랑하고 아꼈던 조부모와 함께 지냈다. 아버지 이재룡씨는 그시절 바둑을 통해 연분(緣分)의 끈이 더 두텁게 된 할아버지와 손자에 대해 ‘궁합이 잘 맞았던 사이’라고 표현했다.
화려한 행마를 자랑하며 세찬 공격을 퍼붓고, 이미 그로기 상태의 상대에게 ‘KO승’을 외치며 달려드는 매서운 바둑의 스승 조훈현9단과는 확실히 달랐다. 조9단은 일본에서의 외로운 바둑 수업, 귀국 후 빈털터리 생활을 하며 생존을 걸고 바둑판과 싸워야했다. 그러나 사랑과 귀염 속에 바둑을 익힌 이창호는 바둑의 목표가 싸움이 아니라 이기는 것임을 가족애 속에서 터득한 것이다.
세번째 이유는 조훈현9단의 집에서 숙식을 하며 바둑을 배우던 내제자 시절 ‘감히 넘볼 수 없는 대스승’에 대한 조심스러움이었다. 천하가 알아주는 속기(速棋)로 상대의 얼을 빼놓은 ‘조제비’의 속력행마에 대한 공부는 이창호로 하여금 속도가 느린 방어 전략을 택하게 했던 것이 아닐까. 느리지만 안전한 세발 자건거. 그러나 제비와도, 아니 벤츠와도 겨룰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이창호의 ‘세발 자전거 기풍’은 이렇게 탄생했다.
〈조헌주기자〉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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