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시인」이산하,11년 침묵깨고 『세상속으로』

  • 입력 1998년 6월 8일 07시 33분


시인 이산하의 이름은 세 개다. 부모가 준 이름 이상백과 얼굴없는 시인으로 살던 시절의 이름 이륭 그리고 이산하. 80년대 이륭이라는 이름으로 숨어다니며 지하운동을 하던 시절 그는 한편의 격문에 가까운 시를 썼다. 고등학교 후배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죽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해 겨울 끝자락이었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없이는 갈 수 없는 땅/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제주도에서 지리산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산하 구석구석에서/민족해방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가신 전사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87년 초봄의 그 시 ‘한라산’. 아무도 제주도 4·3에 대해 얘기할 수 없었던 그때, ‘이 땅은 아메리카의 한 주(洲)…’운운하는 시구로 4·3의 피맺힌 역사를 고발해 대학가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그가 11년만에 시인으로 되돌아왔다. 계간 ‘문학동네’여름호에 발표한 ‘이름없는 풀’등 다섯편의 시가 그의 조용한 귀향신고다.

‘그동안/날지않고 울지 않는 새처럼 살았다/이제 날개는 꺾이고 목은 녹슬었다/…바람처럼 이미 스쳐간 것들/아지랑이처럼 다시 피어오르는 것들/잊혀지지 않는 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었다’(‘날지않고 울지 않는 새처럼’중)

경희대 문예장학생 출신인 그는 ‘한라산’이 보여주는 전투성과는 딴판으로 80년대 “세월좋은 시타령이나 하는 집단”으로 비난받던 ‘시운동’동인으로 활동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 시의 주제는 사물과 의식의 관계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을 극단까지 밀고 올라가 보는 것입니다. 사회현실에 참여한 것도 그 질문의 한 가닥이었지요.”

88년이후수배 구속으로 이어지는 숨가쁜 추격전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는 시를 쓰지 못했다. “함께 80년대를 지나온 사람들의 글이 쏟아내는 과장된 생색내기와 엄살에 기가 질렸기 때문”이었다.

부산출신으로 오로지 자료와 이념에 의존해 ‘한라산’을 썼던 그는 89년 뒤늦게 제주도에서 1년간 살며 역사의 체취를 맡았다. 삶의 흔적이 묻은 시집 ‘한라산’은 내년쯤 펴낼 계획이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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