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이 기획한 ‘한국연극 재발견’시리즈의 첫 작품 ‘혈맥(血脈)’. 한국 현대연극사에서 잊혀진 이름이었던 극작가 김영수(1911∼79)의 대표작을 오늘의 우리 현실을 연상케 할 만큼 오롯이 살려냈다.
대한민국 건국을 앞둔 1948년의 혼란기. 방 한 칸 얻을 돈이 없어 서울 성북동 산비탈 방공호에 세 가족이 잡초처럼 엉켜 살고 있다.
아들 거북이를 미군부대에 취직시킨 뒤 팔자를 고칠 꿈에 부푼 홀아비 털보. 외동딸 복순이를 기생으로 만들기 위해 밤마다 신고산 타령을 가르치는 땜장이네. 해방된 조국에서 살기 위해 징용갔던 일본에서 돌아온 담배장수 원팔이네서는 연일 고성이 끊이질 않는다.
돈벌이는 내팽개친 채 사회개혁을 하겠다며 바깥으로 나도는 동생 원칠과 형 원팔의 불화 때문.이들에게 가장 가깝게 보이는 희망은 댄스홀에 무희로 취직해 집안을 일으키는 ‘헬로 걸’ 옥희다.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찌꺼기만 팔아도 하루 몇천원 수입”(털보)인 현실 앞에서 원칠이나 거북이의 “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호소는 꿈같은 타령에 불과하다.
강한 사회의식을 담고 있음에도 ‘혈맥’은 도식적인 시대고발극을 넘어서 있다. 약삭빠르게 제 살 길을 찾다가 젊은 새 마누라에게 모은 돈을 몽땅 도둑맞는 털보, 죽어가는 형수를 병원에 데리고 갈 돈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운동가’ 원칠의 고뇌 등 살냄새나는 인간들의 모습이 그 어떤 ‘주의’‘주장’보다 생생하게 그려진 까닭이다.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정상철 최상설 등 배우들의 연기도 호소력있다. 무대 3분의 2 높이쯤에 하늘을 걸고 ‘방공호가 뚫린 산비탈’의 모습을 만들어낸 박동우의 소박한 무대도 극에 사실감을 더했다.
작가 김영수는 도쿄 유학시절 이해랑 김동원 등과 더불어 동경학생예술좌를 이끌었던 인물. ‘반역자’‘여사장 요안나’ 등의 작품을 남겼지만 한국전쟁 이후 방송작가로만 활동해 연극사에서 잊혀졌다.
11년만에 국립극단과 함께 작업하는 연출가 임영웅(산울림 대표)은 “고정된 한 무대에서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구현해내는 작가의 치밀한 능력을 접하며 요즘 희곡이 지나치게 아이디어, 감각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닌가 되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21일까지 국립극장 소극장. 휴관없음. 평일 오후7시반 토, 일 오후4시. 02―274―1151∼8
〈정은령기자〉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