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언론인이 되고 싶어 했다. 용암 바위의 숭숭 뚫린 구멍에 재가 쌓이고 거기에 작고 연약한 풀들이 자라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아들에게 말했다.
“보아라. 저 풀씨는 스스로 원해서 저기에 떨어진 게 아니리라. 바람이 혹은 비가 그렇게 했겠지. 그러나 저 풀은 그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뿌리를 내리고 잎을 벌려 있는 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지 않으냐. 남의 나라 땅에서 도공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도 저 풀과 같다. 묵묵히 그러나 당당히… 그렇게 말이다.”
이제 곧 15대 심수관을 이어갈 그 아들은 지금 신실한 도공이 되어 있다.
취재여행의 마지막 날, 심수관씨가 나를 위해 찾아간 식당에서는 ‘김치라면’을 팔고 있었다. 4백년전 여기에 끌려왔을 선조 도공들을 생각하자니 라면발을 끌어당기는 내 목이 메었다. 한 후대 소설가가 여기까지 와서 조국의 김치라면을 먹을 수 있다니. 이것이 4백년의 시간이 가지는 힘인가 싶었다.
어쩐 일인지 ‘사쓰마 도예 4백주년’을 맞는 올해, 옥산궁 주변의 우거진 대숲에서는 선조 도공의 묘가 하나씩 발견되고 있다. 그들의 원점을 말해 줄 귀중한 묘석들이 대숲으로 뒤덮인 땅속에 잠들어 있으리라던 전문가들의 예상대로다.
옥산궁이 있는 산자락에서 발견된 것은 ‘이씨 원조 이인상(李氏元祖李仁上)’이라고 새겨진 부부의 묘. 이씨는 도공이자 일본의 쇄국시대 조선과의 외교에도 공헌했던 조선통사(朝鮮通事)라고 가고시마대 하라구치 교수는 증언하고 있다. 또한 옥산궁 앞 오르막 길 옆에서는 차씨원조(車氏元祖) 차씨이대(車氏二代)라는 두 개의 묘비도 발견되었다(요미우리 신문 4월5일자 보도).
조선 도공들이 끌려와 처음 발을 디뎠던 해안, 통한의 아픔 속에서 생존을 위해 가마를 열었던 가마터… 14대 심수관과 함께 그 옛자리들을 돌아보던 날, 우리는 4백년 전을 생각하며 빗발 속을 걸었었다. 바닷가에서였다. 심수관씨가 천천히 말했다.
“불을 가지고 옵니다.”
가을에는 남원에서 선조가 가지고 오지 못했던 그 ‘조선의 불’을 채취해 일본까지 봉송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옛 선조들이 끌려왔던 그 길을 따라 뱃길로 온다고 했다. 이 말을 하며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어떤 불길같은 것이 너울거리는 듯했다. 먼 수평선 저편, 그곳에는 한국이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홀씨처럼 그들이 닿은 곳,그곳은 도자기로는 황무지였다.
그들은 그 땅에서 그릇이 될 흙을 찾고, 표면을 빛낼 유약을 만들었으며, 불을 지펴 그릇을 구워냈다. 그들이 있었기에 사쓰마 도예라는 한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말 그대로의 창조. 흙에 땀을 섞으며 불에 기도하며 흘러간 세월, 조선 도공들의 가슴은 도혼(陶魂)으로 빛났으리라.
그러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조국은 점점 아름다워지고 더욱 커져 갔을 것이다. 그것이 조국에 대한 배고픔이 되었고 그것은 차라리 여기에서 살아가는데 힘이 되지 않았을까.
남원을 에워싼 노령산맥의 한 허리에서 채화된 불은 거제도를 거쳐 구시기노 해안에 닿게 된다. 그 불은 옥산궁에 안치되었다가 미야마의 여러 가마에 불을 붙이게 된다. 4백년 전 이 땅으로 끌려와야 했던 선조에 대한, 영혼이라도 편안하기를 바라는 후손의 염원이 거기 담겨진다.
이것은 하나의 완성이다. 이제 그들은 4백년 전 박평의 심당길 이인상… 에게 뿌려진 형극의 시간을 창조의 아름다움으로 완성하려 하고 있다. ‘4백년만의 귀향’이라는 전시회의 이름이 그것을 웅변한다. 살아서 그 땅에 뿌리를 내린 인간의 위대함과 빛나는 자긍심이 그 이름에서부터 배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14대 4백년에 걸쳐 한결같이 그 뿌리를 잃지 않았던 한 가족사(家族史)의 정신적 대완결일지도 모른다.
한수산(작가·세종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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