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더위사냥」도 IMF式…빙과 사먹기 유행

  • 입력 1998년 7월 13일 19시 33분


서울 강남구 역삼동 포스코센터 사무실. 최첨단 인텔리전트 사무실에 어울리지 않는 ‘꼬마선풍기’가 책상마다 돌아간다. 그마저 없는 직원들은 연신 부채질.

H사 한모과장(37). 요즘 매일 오후 한 두차례씩 지하주차장으로 ‘피서’를 간다. 자가용의 에어컨을 틀어놓고 10여분간 땀을 식힌 뒤 다시 근무를 시작한다.

엘니뇨의 영향으로 예년보다 2∼4도나 높은 요즘.비용 절감을 위해 에어컨 가동이 제한된 사무실에서 일하는 샐러리맨들에게서 ‘외근직이 부럽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냉방병’과 ‘긴팔 옷’이 유행할 정도로 서늘했던 대기업 건물. 그러나 에너지관리공단이 올해 삼성그룹본관과 삼성화재빌딩 등 8개 건물을 조사한 결과 실내온도는 평균 26∼28도. 지난해의 23, 24도보다 훨씬 올라갔다.

대우 LG 쌍용그룹도 26도 이상.‘실내온도 28도’가 돼야 냉방하는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는 실외온도가 30도가 넘어도 에어컨을 켜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광화문에 있는 한 보험회사의 경우 영업실적이 좋은 부서만 제한적으로 에어컨을 틀어준다.덥다고 하소연할 때마다 듣는 얘기. “더우면 일해!”

지난 겨울 ‘IMF한파’에 이은 올여름 ‘IMF혹서’. 회사가 해결해주지 않는다면 결국 스스로 ‘구조조정’을 통해 해결할 수 밖에.

▼걸친 것은 모두 버블(거품)▼

몸에 걸친 것을 최대한 벗는 것도 ‘구조조정’의 한 방법. 한솔그룹과 제일제당을 비롯한 여러 기업에서 전 사원에게 ‘노타이 패션’을 권장하고 있다. 은행원이나 공무원들로부터 시작된 노타이 패션이 올여름 전체 사무직에 퍼지고 있는 것. 업무상 정장이 필요할 경우 넥타이와 재킷을 회사 옷걸이에 걸어두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 직장 여성들도 투피스정장보다는 원피스나 소매없는 셔츠 등을 입는 추세.

야근 때는 사무실에 반바지가 등장하기도. 기아자동차 이하원과장. “일주일에 3, 4번씩 하는 야근하는 날이면 집에서 미리 반바지 반팔티셔츠 샌들까지 준비해 온다.”

▼꼬마선풍기와 아이스크림▼

상사의 눈을 피해 책상 밑에 놓아두고 사용할 수 있는 날개 8㎝이하의 ‘꼬마선풍기’. 부채와 함께 간단한 개인용 피서기구로 올여름 직장인들에게 ‘선풍적’ 인기다. 롯데백화점 상품매입부 조석주씨는 “하루에 선풍기가 1백대 정도 팔리는데 절반이 소형선풍기”라고 말했다.

땀으로 흠뻑 젖게되는 오후에는 직장마다 빙과류를 살 스폰서를 구하기 위한 ‘사다리 타기’가 한창. 일명 ‘하드타임’. 이 때에는 ‘사오정 시리즈’같은 썰렁한 이야기나 무서운 이야기도 곁들여진다.

▼적정 실내 온도는?▼

냉방온도는 외부온도 보다 5∼6도 낮게 하는 것이 바람직. 외부온도가 30도면 냉방적정온도는 24∼25도. 이보다 높으면 스트레스를 유발, 잦은 휴식으로 업무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 에어컨 1대는 선풍기 30대의 전력을 소모하므로 냉방시에는 에어컨과 선풍기를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다.

삼성서울병원 건강의학센터 유준현부소장은 “땀을 많이 흘리는 직장인은 건강을 위해 적게 먹더라도 식사를 거르지 말아야한다”고 조언.

그러나 요즘 대부분의 사무실은 에어컨이 없어도,선풍기나 부채가 없어도 이미 ‘충분히 썰렁한’ 분위기다. ‘은행퇴출’ ‘정리해고’ ‘구조조정’ ‘상여금 삭감’ 등 어떤 괴담(怪談)보다 으스스한 단어가 떠돌고 있기 때문. 직장인들은 별다른 더위 대책없이 대부분 일로서 여름을 이겨나간다. 부도 후 연일 야근하는 한 회사 직원의 말. “모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지요. 전쟁에 나선 병사들이 더위를 탓할 수 있나요?”

〈전승훈기자〉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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