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국극이여, 일어나라』…탤런트 이정섭의 國劇사랑

  • 입력 1998년 7월 29일 19시 36분


58년 4월 서울 동양극장. 객석 어른들 틈에 끼어앉은 열두살소년 이정섭은 무대 위에 펼쳐진 아름다운 세상에 넋을 잃고 있었다. 딱 한번 구경한 창경원보다 더 멋진 궁전에서 하늘하늘한 나이롱천으로 선녀같은 옷을 지어입은 아매리공주와 늠름한 사무라태자가 나누는 사랑의 약속. 그날의 공연, 진경여성국극단의 ‘꽃이 지기 전에’는 한 소년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사람 죽이드구먼.내가 배우가 된 게 다 그날의 감동 때문이지 뭐유.”

이정섭. SBS의 간판시트콤 ‘LA아리랑’에서 특유의 코맹맹이소리로 ‘여자같은 남자’를 연기해내는 탤런트. 그러나 그의 첫사랑은 영화도 TV도 아닌 여성국극이다.

60년대 초반 이후 국극이 ‘사이비예술’로 몰리고 판소리와 영화에 밀려 자취를 감춘 후에도 ‘국극이 우리나라 무대예술의 환상으로 남아야 한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그. 관련학자들조차 ‘걸어다니는 여성국극 사전’이라며 그에게서 자료를 구할만큼 여성국극의 역사를 줄줄이 꿰는 해박함. 40년 세월에도 바래지 않은 그 열정을 마침내 작품으로 무대에 올린다.

그가 직접 구성하고 연출한 창작 여성국극 ‘진진의 사랑’. 여성국극 스타 김진진의 일생을 통해 국극 부침의 역사와 국극배우의 삶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보여줄 작품이다. 극중 진진은 실제의 김진진이 맡는다.

“4년전에 ‘패왕별희’라는 중국영화를 봤는데 기가 막힙디다. 두 경극(京劇)배우의 일생을 통해 경극의 특질과 중국현대사의 비극을 다 보여 주잖우. 우리 여성국극으로도 저런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데 싶은 생각이 그후 떠나질 않았는데….”

올해초 김진진이 그를 찾아왔다. “핫바지에 방귀 새듯 이렇게 연기인생을 끝낼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좋은 작품 하나 하고 싶다.”

가슴 속 평생의 우상인 김진진의 간절한 소망. 더 생각할 것이 없었다. “선생님이 깨지든 내가 깨지든 한번 해봅시다”. 평소 ‘한국적인 대안뮤지컬을 찾자’고 주장해온 후배 김민기가 기꺼이 극장을 빌려주겠다며 힘을 보탰다.

매맞으며 판소리와 춤 연기를 익혀야했던 가혹한 수련기. 임춘앵 김진진의 스타들이 누렸던 영광과 국극의 서글픈 조락. 90년대 국극을 되살리려는 노배우들의 안간힘…. 그 사연들 속에 왕년의 히트작 ‘공주궁의 비밀’ ‘백호와 여장부’ ‘언약’ 등의 하이라이트 장면들을 극중극으로 삽입했다.

“국극이 쇠퇴한 이유는 관객들의 감성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만화같은 진부한 구성에 안주했던 데도 있어요. 젊은 국극배우들을 길러내고 변모된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번 공연은 그 도전이에요.”

4일부터 9월13일까지 학전블루. 화∼금 오후7시반 토 오후4시 7시 일 오후3시 6시. 02―763―8234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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