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짜증 『싹』 직장인 록밴드 떴다

  • 입력 1998년 8월 30일 20시 11분


‘도시인’가수 신해철의 자작곡에 묘사된 90년대 직장인의 단면. ‘어젯밤 술이 덜 깬 흐릿한 두 눈으로/자판기 커피 한잔 구겨진 셔츠 샐러리맨…. 한 손엔 휴대전화, 허리엔 삐삐차고/집이란 잠자는 곳,직장이란 전쟁터’

최악의 경제상황 속에 직장인들의 스트레스는 커져만 간다.비상구는 없는 걸까.

38세의 정덕기차장. 한국종합무역전시관(KOEX) 내 한 중소무역업체에 근무. IMF시대가 시작된 뒤 환율변동이 심해지면서 언제 달러를 사고 팔아야할지 마음 고생이 심하다.

정차장은 6월 PC통신 천리안의 ‘악기 동호회’에 가입했다. 바로 날아온 메일. ‘제일 형님이신 것 같은데 직장인 밴드를 함께 할 생각이 있느냐’는 내용. 보낸 사람은 빙그레 마케팅실의 김태성대리(34).

이런 식으로 합류한 직장인 록밴드의 멤버는 4명. 30대 직장인으로 학창시절 기타 베이스 드럼 등을 치며 ‘한가닥’했던 사람들이다.그룹 이름은 김대리가 자주 가는 서울 압구정동의 카페 이름을 딴 ‘좋은세상 만들기’. 매주 토요일 오후 2시간 동안 서울 잠실에 있는 합주실을 3만원에 빌려 호흡을 맞춘다. 첫 공연은 다음달말 같은 이름의 카페에서 열 예정.

록밴드의 매력에 대해 정차장은 “환율은 내 뜻대로 되지 않지만 기타는 손가락이 가는대로 말을 듣는다”고 설명. 김대리는 “주말에 연주로 스트레스를 풀고 나면 월요일에 가뿐하게 일을 시작할 수 있어 좋다”고 거들었다.

넥타이부대가 만든 직장인 록밴드가 늘고 있다. ‘좋은세상 만들기’ 외에도 올들어 갑종근로소득세를 내는 직장인들이 모여 만든 ‘갑근세’, 성남의 직장인들이 결성한 ‘복개천’, 외환은행 직원들이 뭉친 ‘노네임(아직 이름을 정하지 못했다)’ 등이 생겨났다.PC통신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직장인 록밴드도 10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최대 회원을 자랑하는 그룹은 ‘갑근세’. 6월 PC통신을 통해 결성된 이 밴드는 광고회사직원과 교사 등 2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 ‘갑근세’ 산하에는 ‘부가가치세’‘근로소득세’ 등의 연주팀이 조직돼 팀웍을 다지는 중.

외환은행 록밴드는 사내컴퓨터 게시판을 통해 모인 5명의 멤버 중 2명이 여행원이란 것이 특징.보컬리스트 김윤정씨(26·동대문지점)는 “여자가 무슨 록이냐며 편견을 내비치는 남자도 있지만 여자가 소화할 수 있는 곡도 많이 있다”고 강조.이들은 연말에 외환은행 본점 강당에서 데뷔 공연을 가질 예정. 주말이면 자정까지 연습하는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다.

OB맥주의 박성진대리(31)는 록밴드에서 갈고 닦은 실력으로 회사에 봉사하는 경우. 대학후배들과 ‘2년 차이’라는 그룹을 조직한 그는 백화점과 해수욕장에서 벌어지는 맥주 판촉행사에 참여해 기타실력을 자랑해왔다.

별다른 연주경력이 없지만 록음악을 해보겠다며 뛰어드는 직장인도 많다.‘방배동 드럼동호회’ 회장 신동훈씨(31·코리아나화장품)는 “올들어 드럼을 배우겠다며 찾아온 직장인만도 40여명이 넘는다”고 소개.

왜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걸까.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씨(40)는 “산울림 송골매 레드제플린 등의 음악을 들으며 자란 30대 직장인이 문화소비자에서 문화생산자로 옮겨가는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노래방에서 일차적인 계기가 마련된데 이어 록음악을 틀어주거나 연주하는 록카페가 늘어나면서 록밴드의 결성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해석.

‘좋은세상 만들기’의 김대리가 던진 한마디. “우리에겐 ‘락’(Rock)이 낙(樂)”이다.

〈김홍중기자〉kima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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