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작가 이제하가 한 후배 여성작가의 장편소설에 덧붙인 평문 속에 스케치한 90년대 여성소설가들의 등장배경. 공선옥(35)도 그런 풍경을 뒤로하고 90년대 소설가로 등장했다. 비빌 언덕은 커녕 삶을 옥죄는 덫같은 아비와 남편을 떠나. 그러나 그녀에게는 남다른 점이 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며 동년배 여성작가들이 가방 하나 달랑 들고 풍비박산 난 집을 떠날 때 그는 울며 매달리는 어린 자식들을 업고 걸리며 먼 길을 떠난다. 납덩이처럼 자신의 삶을 저 밑바닥으로 끌어당길 줄 알면서도 기꺼이 자식들을 품어안는 모성. 4년만에 펴내는 두번째 창작집 ‘내 생의 알리바이’(창작과비평사)를 관통하는 생명력은 바로 그 어미가 뿜어내는 것이다.
‘모정의 그늘’등 수록된 11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어미들의 처지는 사면초가다. 한때나마 사랑을 나누었던 남편들은, 프레스 기계에 팔뚝을 잘린 후 깡패가 돼 딴살림을 차리거나(‘어미’) 저만 살겠다고 궁색한 삶에서 달아났거나(‘술 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 평생 술타령과 주먹질로 세월을 보내다 세상을 떠난다(‘모정의 그늘’).
“새끼를 뱄다고? 너, 누구 죽일 일 있냐?”
더 잃을 것도 없는 가난한 삶이지만 소설 속 아비들은 자식들때문에 더 단단히 운명에 덜미를 잡힐까봐 도망친다. 어미들이라고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먹고 살 일이 막막해 아이의 친권을 포기할까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아이들을 아동일시보호소에 맡겨놓고 돈 벌러 타지로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끝내 아이들을 버리지 못한다.
‘남편’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제도도, 지난 시절의 이데올로기적 열정도 더 이상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할 때 소설 속 여인들에게 살아갈 힘이 되는 것은 ‘새끼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누선을 자극해온 ‘가난한 어미노릇’에 관한 이야기가 공선옥에 이르러 빛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 어린 자식들의 서툰 걸음에 자꾸 발걸음이 처지면서도 그 손을 꼭 잡고 묵묵히 또 내일을 향해 걸어가는 몸짓이기에….
〈정은령기자〉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