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기든스교수,한상진교수와 「한국사회진로」대담

  • 입력 1998년 10월 13일 19시 18분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초청으로 11일 방한한 ‘제3의 길’의 저자 앤서니 기든스 런던정치경제대 학장과 서울대 한상진(韓相震)교수가 12일 동아일보에서 만나 ‘제3의 길과 한국사회의 진로’에 관한 심도있는 대담을 나눴다. 기든스교수는 현대사회에서 좌파와 우파의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고 규정하고 21세기는 제3의 길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지배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제3의 길은 경제위기와 가치관의 혼란, 실업과 사회불안 그리고 분단 상황의 한국에서도 여전히 유용한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기든스교수는 13일 아침 서울 롯데호텔 사파이어룸에서 ‘탈주의 세계? 세계화의 충격’이란 제목으로 자신의 ‘제3의 길’에 대해 강연했으며 이날 오후 출국했다.》

△한상진〓먼저 기든스교수께서 말씀하시는 ‘제3의 길’에 관해 논의의 초점을 맞추었으면 합니다. 제3의 길은 어떤 개념이며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까.

△기든스〓서구사회에서 계급구조는 크게 바뀌었습니다. 부르주아와 노동계급의 구분은 더 이상 큰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됐습니다. 정치는 이제 무정형적이기는 하지만 새롭게 등장하는 중간계급을 포괄하는 틀로 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신자유주의와 구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기든스교수는 우파와 좌파라는 단어 대신에 신자유주의와 구사회주의라는 말을 많이 썼다).

제 이론에서 독특한 점은 역동적인 정부를 역동적인 시장과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국가나 시장이 서로 상대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하는 것이지요.

△한상진〓제3의 정치가 과거 좌우파간의 오래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까.

△기든스〓저는 앞으로 적어도 20년간은 제3의 정치가 지배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지난 20년간을 풍미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다고 제3의 길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한상진〓제3의 정치가 세계를 지배할 것으로 정말 확신합니까.

△기든스〓확신합니다. 왜냐하면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고 모든 문제를 시장의 기능에 맡겼던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극우파는 현재 세계 곳곳에서 경제적 문화적 보호주의를 주창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현상으로 제3의 정치는 여기에 단호히 맞서야 합니다.

△한상진〓제3의 정치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기든스〓정부가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는 좌익 사회에서는 정부가 시민사회를 지배하게 됩니다. 과거 영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고 지금의 중국이 이런 체제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부와 시민사회 간에 진정한 공생관계 또는 파트너십이 필요합니다. 활력있는 시민사회가 제3의 정치의 중심 테마입니다.

△한상진〓현재 진행되는 세계화가 미국의 패권을 재확립하는 과정이라는 견해가 있는데요.

△기든스〓그렇게 생각지는 않습니다. 미국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지만 서방선진7개국(G7)이나 유럽연합과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미국이 첨단 통신망과 전파매체를 통해 정보와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현재로선 이에 대한 뚜렷한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저항도 크지 않습니까.

△한상진〓영국 프랑스에 이어 독일에서도 좌파 정부가 들어섭니다. 21세기를 앞둔 이 시점에서 유럽인들의 좌파 선택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보십니까.

△기든스〓세계화시대에 한 개인이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주요 강령중 하나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이런 점이 극단적으로 치우친 결과 개인의 소외라는 결과를 낳게 됐습니다. 유럽에서는 지식인 뿐만아니라 일반인도 이같은 사실을 인식하게 됐습니다. 특히 유럽인의 가장 대중적인 관심은 보건과 교육체제입니다. 유럽의 좌파물결은 보건과 교육체제가 더 이상 시장논리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원치않는다는 명백한 의사표시입니다.

△한상진〓지금 한국은 유례없는 고실업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사회적 투자국가’ 개념에 비춰볼 때 어떤 정책 대안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또 실업문제를 위한 어떤 해결책이 있겠습니까.

△기든스〓12일 김대중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이 문제에 대해 한참 논의했습니다. 제가 말하는 사회적 투자란 인적 자본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복지국가는 국민이 불행에 빠졌을 때 이것을 직접 돈으로 구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것은 직업훈련 교육개혁 같은 정책으로 고용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사실 현재 전세계의 경제학자들이 일자리 창출을 위해 머리를 짜내고 있습니다만 실업문제에 대한 만병통치약은 없습니다. 기술변동에 의해 완전고용이 이뤄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합니다.

△한상진〓한국은 오랫동안 엄청난 권력을 가진 정부와 재벌에 의해 이끌려 왔습니다. 우리가 참여민주주의를 활성화하기 위해 제3의 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기든스〓정부 경제계 그리고 시민사회 3자간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미국의 대통령 부인 힐러리여사가 묘사했던 대로 3개의 다리를 가진 의자같은 것이지요. 이것만이 국민의 삶을 안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한상진〓한국 뿐만 아니라 많은 유럽국가에서도 제도 정치권에 대한 혐오감이 팽배해 있습니다. 대중의 정치적 의구심을 해소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구상해본 적이 있습니까.

△기든스〓오늘날 정치인을 의심하는 것은 전세계적인 현상입니다. 어느 정당도 지지하지 않거나 투표에도 참여하지 않는 국민이 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 저는 정치적 지도력을 다시 활성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또 민주주의를 보다 투명하게 재생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경제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는 지났습니다.

△한상진〓우리나라에서는 엄밀한 의미의 좌우파 정부를 가져본 적이 없으며 오랫동안 이 문제에 대한 논의조차 어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북으로 갈라져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한반도에 제3의 길이 어떤 유용성을 갖는다고 보십니까.

△기든스〓저는 한반도 문제 전문가는 아닙니다. 대신 북아일랜드의 예를 말씀드리지요. 신구교간의 갈등을 겪고 있는 북아일랜드에서는 영국과의 관계보다는 아일랜드와 영국, 더 나아가 유럽과의 관계 등에서 다중적인 주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변했고 주권 개념이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영토는 더 이상 과거처럼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남북한이 곧장 통일을 추구하기 보다는 일정한 중간단계를 두고 각각 자율성을 유지한 채 다른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통일이라는 제3의 길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상진〓김대중대통령을 면담하셨는데 그의 생각이나 지도력에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기든스〓권력의 정점에서 나라를 이끌어가는 일은 야당시절 국정의 방향을 논의하는 것 같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여러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지도자로서 저는 그를 존경합니다. 이런 지도자가 있는 것이 한국인에게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정성희기자〉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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