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부 못한다고 속상해하지 마라’라는 책을 펴낸 삼성에버랜드 유통사업부 이준혁과장(37). 고등학교 시절 성적이 꼴지를 맴돌고 싸움질만 하던 그는 호텔 ‘보이(웨이터)’가 됐다. 10여년 뒤. 그는 특급호텔의 지배인이 됐고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증권회사에서 잘나가던 고등학교 친구는 최근 명예퇴직당했다.
IMF시대라는 예기치 못한 사태는 외길을 달려온 샐러리맨들의 운명을 뒤흔들어 놓았다. 갈림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이들 중에 자식만큼은 불안한 외길을 달리게 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경우가 늘고 있다. ‘두개의 미래’가 있다면….》
▼ 두개의 국적 ▼
항공사에 근무하다 사내 결혼한 김모씨(36·서울 강남구 일원동)부부. 둘다 토종 ‘한국인’이지만 김씨의 아내는 지난해말 임신 8개월째 일반비자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아이를 낳으러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친지집에 간 것. 막대한 병원비와 벌금을 물었지만 아들에게는 ‘미국 시민권’을 쥐어줄 수 있었다.
태평양정보컨설팅 이명호사장. “속지(屬地)주의를 택하고 있는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아이를 낳으면 그곳 시민권과 한국국적을 함께 얻은 뒤 만 18세에 한쪽을 선택할 수 있다. 요즘에는 미국에 연고도 없는 사람들이 ‘임신해도 비자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문의해 온다.”
서울 연희동이나 경기 성남에 있는 외국인학교의 경우 이중국적의 한국인 학생도 약 20%를 차지. 1년 학비는 2천만∼3천만원. 한국과 외국을 동시에 가르치려는 부모들의 열의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국골프연구소 이상엽(33)씨. “박세리선수가 ‘출세’한 뒤 어린이 골프붐이 일어났지만 국내 프로골프 레슨비가 한달에 2백만∼4백만원이기 때문에 미국이나 호주로 유학보내는 경우가 많다. 기왕 돈을 쓸 바엔 ‘골프’와 ‘영어’라는 두가지 토끼를 잡으려는 시도다.”
▼ 두개의 뇌 ▼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의 로저 스페리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좌뇌는 논리와 이성적 기능을, 우뇌는 창조 직관과 예술적 사고를 담당. 좌뇌형 교육이 위주였던 우리나라 교육패턴 탓에 ‘잠재력의 80%가 잠자고 있는’ 우뇌가 숨겨진 ‘또다른 미래’인 셈. 이에 따라 문화센터의 영재개발프로그램에는 ‘EQ’와 ‘전뇌교육’ 등이 인기.
서울 여의도에 있는 연기학원 MTM에는 어린이 1백여명이 반을 나눠 연기연습을 하고 있다. ‘유아연기교본’을 들고 카메라앞에서 울고 웃는 표정연기가 진지하다. 주부 최미숙씨(42·서울 아현동). “아이가 여러사람 앞에서 활발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등 사회성이 크게 신장돼 연기자가 되든 아니든 미래의 선택폭은 넓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 용꼬리 No,뱀머리 OK ▼
가장 확실한 ‘두개의 미래’ 준비는 ‘공부’와 조그만 것이라도 ‘자기만 갖추고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
서울 광양중 3학년생에 대한 장래희망 조사 결과 백댄서 컴퓨터프로그래머 메이크업아티스트 가수 바둑기사 만화가 등 자신만의 특기가 필요한 분야가 절반 이상을 차지. 담임 조혜선교사는 “예전과 달리 중학생인데도 상당히 구체적인 직업관을 가진 학생이 많다. 거대한 조직의 꼬리가 되기 보다는 능력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찾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국능력개발원 김한규원장. “미래의 고도정보화사회에는 단편적 지식보다는 순발력 있는 ‘멀티형’ 인간이 필요하다. ‘두개의 미래’ 자체도 부모의 입김 보다는 스스로 고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승훈기자〉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