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까리귤라」, 전설적 폭군 내면심리 파헤치기

  • 입력 1998년 11월 17일 19시 09분


“미친 짓이죠. 정말 미친 짓입니다.”

연출자든 배우든 연극 ‘까리귤라’를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모한 짓”을 벌이고 있다고 말한다.

작가 알베르 카뮈 스스로 ‘이방인’ ‘시지프신화’와 더불어 부조리철학을 완성한 작품의 하나로 꼽은 역작 ‘까리귤라’(38년작). 그러나 한국에서는 상업연극계에서 이 작품에 도전한 예를 찾기 어렵다.

폭군의 기행만 나열했더라면 잔혹극과 에로연극을 오가는 ‘흥미진진한 볼거리’가 될 수 있었겠지만 카뮈의 ‘까리귤라’는 두시간반동안 철학적 은유로 가득찬 대사를 통해 전설적인 폭군의 내면적 동기를 파헤친다.

이번 공연의 연출자 채윤일은 원로 불문학자 정병희교수의 번역문중 단5분만을 잘라내 두시간반 공연을 강행했다. 거기에 무대미술가 박동우는 관객들이 눈앞의 볼거리보다는 자신의 심상속으로 빠져들도록 모노톤의 계단 몇개와 거울로 무대를 철저히 절제했다.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재담과 눈요기에 익숙한 요즘 관객들에게 ‘까리귤라’의 정공법은 무모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까리귤라역의 배우 김학철은 이 무모한 시도의 선봉장이 돼 관객들을 정면돌파해야 하는 처지.

“유난히 폐활량이 큰 덕을 봅니다. 소극장무대이다보니 낮은 속삭임도 객석 구석구석까지 울리게 할 수 있거든요.”

치켜올라간 눈매, 얄팍한 입술, 그 위에 서리는 싸늘한 웃음. 강렬한 인상때문에 일찌감치 악역 단골의 ‘성격파 배우’로 자리를 굳혀온 그지만 일신의 영달을 위해 타인을 짓밟는 약삭빠른 하수가 아니라 ‘삶의 이유를 묻는’ 지적인 악인을 연기하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연출자 채윤일은 그에게 “절대 감정과잉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함부로 소리지르는 대신 마치 파도를 타듯 대사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김학철. 감정을 꾹꾹 눌러가며 “인간은 다 죽어, 그러니까 인간은 행복하지 못해”라는 까리귤라의 광기와 허무 속으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공연은 12월27일까지. 서울 마포구 서교동 산울림소극장 화∼목 오후7시. 금∼일 오후3시 7시. 02―334―5915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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