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연을 맺은지 13년. 제자는 스승의 속내를 자식보다 더 속속들이 알고 스승은 제자를 쉽게 ‘하산’시키지 못한다.
‘서편제’ ‘태백산맥’ 등 영화사에 남을 작품을 영상에 담아낸 촬영감독 정일성(69)과 그의 수제자 이후곤(33).
90년대 중반이후 유학파 촬영감독들이 대거 등장하고 엄격한 도제훈련을 거친 촬영감독들은 이미 대부분 데뷔한 충무로에서, 아직까지 사제의 연으로 묶여있는 두사람의 관계는 우리 영화현장의 마지막 도제 시스템이라 함 직하다. 그들이 함께 일하는 영화 ‘침향’(감독 김수용)의 촬영모습을 서강대 언론대학원 방송아카데미 영상인류학 연구팀이 6㎜카메라로 낱낱이 기록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기중 선임연구원은 “혹독한 훈련을 치러내고 맺어지는 도제 유형의 마지막 사례”라며 “아버지가 장자에게 유산을 물려주듯 혈육이상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평했다. 이후곤은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정감독밑에서 도제생활을 시작했다. 13년동안 함께 촬영한 영화가 30편이 넘는다.
성정이 불같기로 소문난 정감독밑에서의 도제생활이 쉽지는 않았을 터. 한번은 이씨가 연애한다는 소문이 돌자 정감독이 그를 가차없이 ‘짤랐다’. “연애하는 아이치고 실수 안하는 사람없다”는 이유.
화가 치민 이씨는 “다 때려치우겠다”며 뛰쳐나갔지만, 인연은 따로 있다던가. 6개월 뒤 우연히 충무로 길거리에서 맞닥뜨린 정감독은 “너 잘 만났다, 넌 딴데 못가”하고 이씨를 붙잡았다.
“그렇게 데려와놓고는 감독님이 2년동안 정말 저한테 심하게 하셨어요. 연기자가 실수해도 내가 걷어차이고…. 그래, ‘너 없으면 일못하겠다’는 말을 듣는 것이 내가 이기는 거다, 그런 오기로 버텼죠.”(이후곤. 그는 아직도 결혼하지 않았다)
90년 ‘장군의 아들’을 촬영할 때 이씨를 제1조수로 올려주면서 비로소 ‘사람 대접’을 하기 시작한 정감독.그전엔 왜 그랬을까.
“도제는 단순히 스승 어깨너머로 배우는 게 아닙니다. 그런 수모를 견뎌내지 못하면 집단적 작업인 촬영현장에서 나중에 사람들을 관리해내기 어려워요. 촬영감독에게 필수적인, 작품을 부감(俯瞰)해서 바라보는 눈도 현장에서의 도제훈련없이는 갖기 어렵죠.”
내년 1월 데뷔할 이씨에게 ‘침향’은 정감독의 제자로 참여하는 마지막 작품이다. 정감독은 “지금 졸업시험 보는 것”이라며 웃지만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난 현장에서 죽을거니까 저 놈이 곧 내 라이벌이 되겠죠. 허허, 이것 참….”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