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뒤 맞은 미국의 1백주년 독립기념일, 그는 미국인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따라 ‘센테니얼왈츠’를 헌정했다.
그는 이미 19세기 후반에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의 악보를 10만부나 판매한 작곡가였으며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와 1872년 보스톤 연주등으로 이미 전세계적인 인기를 모았던 대중적인 음악가였다. 당시 빈 왈츠는 콘서트홀에서 앉아서 조용히 감상하는 소나타나 콘체르토와 달리 볼룸에서 스탭을 밟으며 남녀가 즐겁게 춤추는 행동적인 음악으로 현재의 댄스뮤직에 비길수 있는 대중적인 음악. 그래서 오슈트리아인들중에는 요한 슈트라우스를 마이클 잭슨이나 믹 재거(영국 록그룹 롤링스톤즈의 가수) 같은 팝스타에 비견하는 사람도 많다.
빈은 그런 요한 슈트라우스가 태어나고 자라고 사랑하고 일하고 마지막 숨을 거둔 곳. 그리고 그를 통해 새로이 태어난 ‘왈츠의 도시’다. 모차르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최고 전성기였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시절에 명성을 날렸다면 요한 슈트라우스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 프란츠 요셉 통치하의 최전성기 빈에서 그 명성을 구가했다.
그는 이름이 같은 아버지의 왈츠를 새롭게 발전 시킨 청출어람(靑出於藍)의 표상이고 16세 연상∼25세 연하의 여인과 세차례나 결혼할 만큼 정열적인 인간이었다. 방안 가득히 골동품을 채우고 만년을 행복하게 지냈던 재력가였고 프란츠 요셉왕과 엘리자베스 왕비 결혼식(1854년)의 결혼무도회 연주를 맡을만큼 왕의 총애를 받았던 음악가로 그의 일생은 그의 음악만큼이나 행복하고 화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