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를 바탕으로 삼았다고 해서 고루한 옛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시대의 바리데기 공주는 부모와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해외입양아 ‘바리 보오만(Bari Bowman·이선희 분)’. 테크노음악이 귀를 찢는 락카페에서 미국인 애인에게 결별선언을 들은 바리는 자살을 기도, 가물가물하는 의식 속에 고대의 폐허도시로 찾아든다.
병든 아버지 오구대왕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황천강을 건너 억겁의 여행을 떠나는 바리데기 공주. 전생의 바리는 검은 빨래로 가득찬 빨래터에서 검은 빨래가 흰빨래가 되도록 인고(忍苦)의 시간을 보내며, 한없이 무쇠다리를 놓고, 끝없이 탑을 쌓으며 끝없는 희생의 여로를 걷는다.
드디어 스스로를 버림으로써 아버지와 조국을 살린 바리데기 공주, 현실 속의 바리 보오만은 환희에 차서 “나는 나를 찾았어. 나는 가치있는 인간이야”하고 노래를 부르고….
“설화 ‘바리데기 공주’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과 순응적 운명관에 우회적으로 도전하는 여성 영웅신화다. 유일한 여성영웅을 그린 이 설화를 통해 모성과 여성성을 세기말의 희망으로 제시하고 싶었다.”
서울예술단의 기획의도. 전생의 지옥과 황천강, 고구려 벽화에서 미국 뉴욕으로 시공간을 넘나드는 무대전환, 강렬한 북장단과 테크노 음악, 바이올린의 애절한 선율은 천상세계의 한판 굿을 연상시키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꽃잎’ ‘아름다운 시절’ 등에서 숨막힐 듯 아름답고 절절한 영화음악을 들려줬던 원일의 음악이 빛을 내뿜는다.
뛰어난 가창력의 이선희가 엄청나게 예쁘게 변신한다는 것도 화제거리. 서울예술단 단원들과 함께 윤복희 유인촌 유열 박철호 유희성 전수경 등 빼어난 뮤지컬배우들이 총출동한다. 김효경 연출. 평일 오후7시반 금 토 오후4시 7시반 일 오후3시 6시반. 02―523―0987
〈전승훈기자〉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