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가본 21세기 생활과 문화]일도 사랑도 영상으로…

  • 입력 1998년 12월 31일 18시 06분


주민등록번호가 3이나 4로 시작되는 사람들을 상상해보자. 앞으로 3개월, 아니면 4개월 안에 엄마의 자궁안에 들어서게 될 ‘밀레니엄 키드’.

0과 1로 이루어진 비트세계 속을 숨쉬는 아이들, 설령 Y2K(2000년을 읽지 못하는 컴퓨터의 착오로 생기는 오류)로 병원이 정전되더라도 치열하게 살아남는 것으로 생을 시작해야 할 밀레니엄 키드는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영상메일을 읽어야 합니다.”

2030년의 봄. 비만이 걱정스러운 J양(15·D사이버학교10년)이 ‘영양은 높이고 칼로리는 빼고 햄버거’를 먹는 동안 저놈의 ‘홈 컴’이 네번째 읊조린다. 더이상 늑장을 부리다간 ‘원활한 컴퓨니케이션(컴퓨터와 커뮤니케이션의 합성어)을 방해하는 혐의’로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알았어. 열어봐.”

J양의 지시가 떨어지자 거실벽 대형 메인스크린에 대구에 사는 오빠(30)의 얼굴이 떠올랐다.

“노동과 생산을 중심으로 한 지난 2천년간의 문명이 컴퓨터를 매개로 한 커뮤니케이션 중심의 문명으로 대전환을 이루고 있다.”

정진홍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는 저서 ‘커뮤니케이션 중심의제 시대’에서 이제 문명을 움직이는 기본 동력이 인간의 직접적인 노동이 아니라 컴퓨터와 매개 결합 융합된 커뮤니케이션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디지털혁명은 단순한 테크놀러지 혁명을 일으킨 것만이 아니다. 호모 컴퓨덴스(Homo Compudens·컴퓨터와 커뮤니케이션하는 사람)의 인간형이 출현하고 전방위적 생활의 변화, 새로운 문화혁명이 벌어지고 있다.

“나 결혼한다. 유럽연합(EU)중앙은행에서 연락이 왔어. 어차피 재택근무니까 여기서 일해도 상관없지만 동거를 끝낸 것을 기념할 겸 신접살림은 프랑스에서 차리기로 했어.”

“오빤 정말 스머그(SMUG·Smart Mobile Upward Global·똑똑한 지식노동자이며 물리적 기동성뿐만 아니라 생각에 유동성을 갖추고 사회적 상향을 지향하는 지구촌형 인간. 밀레니엄 키드의 우생족인 셈)족이야. 취업과 결혼을 동시에 해내다니. ‘정보 귀족’소리를 들을 만한 걸….”

“미래사회의 가족 형태는 전통사회의 대가족이나 산업사회의 핵가족과는 다른 홀부가정, 홀모가정, 동성 및 독신, 동거 가정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될 것이다.”

LG전자 LSR연구소의 김은미박사(가족사회학)의 전망. 그러나 사회적 스트레스가 심화되면서 가족은 불완전한 형태일지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살찌우는 제도로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회참여비율이 남성과 같아진 여성들은 결혼을 속박으로 여겨 동거를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21세기초 출생률은 세계적으로 감소할 가능성이 높다. 인구 노령화가 심각해지면서 젊고 유능한 인재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스머그족이라면 개인 프로필을 ‘세계 통신망’홈페이지에 올려놓을 경우 전세계의 스카우트들이 조건을 제시해온다.

그러나 ‘정보 귀족’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신한종합연구소 박영배연구원은 “기술발전과 지식정보 집중으로 인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해진다. 지식과 정보는 독점되고 소수의 슈퍼스타와 다수의 패자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예측.

전반적으로 생활수준이 높아지더라도 ‘정보속도 경쟁’에서 처진 사람들은 일자리와 일할 권리를 잃을 가능성이 높다.

J양은 결혼선물을 고르기 위해 사이버 쇼핑몰에 접속했다. 전자지갑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오빠의 주소로 배달되도록 주문한 뒤 오후2시 미술수업에 접속, 그래픽 툴을 사용해 공부를 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딩동 소리와 함께 ‘가족 의무 커뮤니케이션규칙’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얼굴이 컴퓨터에 떠오른다. “수업은 재미있었니?”아직도 기원전(B.C.·여기서는 Before Cyber를 말함)시대를 잊지 못하는 아버지는 심한 스트레스로 일주일에 한번씩 서울에 가서 대면치료를 받고 있다.

미래사회의 교육과 직장근무는 가정에서 컴퓨터를 이용한 형태가 보편화될 전망. 등하교하는 학교도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상류층만을 위한 특수학교가 될지도.

어린이와 청소년 인구가 줄어드는 것과 반비례해 이들 ‘아동 귀족’에 의한 소비는 사회적으로 가장 큰 시장으로 떠오른다. 최근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새로운 천년의 가장 중요한 추세 가운데 하나로 ‘크로스 에이징(Cross―Aging·어린이가 어른같고 어른이 어린이처럼 되는 현상)’을 꼽기도 했다.

한때 불치병으로 불렸던 질병이 유전자적 치료법에 의해 정복되면서 노령인구가 늘고 평균수명은 높아진다. 그러나 박진생정신과의원의 박원장은 “21세기 가장 전망있는 사업으로 음악치료 심리치료 등 ‘마음관리 산업’이 거론되고 있다”며 밀레니엄 키드에게 정서적인 축복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몸과 마음의 건강이 새 밀레니엄의 핵심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박중현기자〉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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