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씨 「사전예매 책제작」화제

  • 입력 1999년 1월 12일 19시 49분


검은색 도포자락에 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우렁찬 목소리로 대중집회를 이끌던 재야의 원로 백기완(白基玩·66)씨. 평생을 민주화 통일운동에 몸 바쳐 두차례 대통령선거에도 출마했던 백씨. 그의 하루는 도시락을 싸들고 집을 나서면서 시작된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 후미진 골목에 있는 ‘통일마당 집’의 싸늘한 안방.방안에서도 누비 옷을 덧입고 원고지에 뭔가 끄적이고 있던 백씨를 만났다.

“군사독재보다 ‘세상의 냉대’가 더 무섭더구먼.”

지난해 1월. 그가 소장으로 있던 통일문제연구소가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 67년 장준하(張俊河)선생과 함께 세운 백범사상연구소로 출발한 통일문제 연구소는 유신시절 유일한 재야단체 사무실이었다. 5공시절까지 4차례 강제 폐쇄를 당하는 등 어떤 고문과 탄압에도 30년간 꿋꿋이 지켜온 곳이었다.

비가 억수로 오던 지난해 6월말. 인천에서 문학강좌를 마치고 만원 전철을 탄 백씨는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누구하나 백씨를 알아보고 자리를 양보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저고리에 넣어 두었던 강의 사례금 2만원까지 소매치기를 당했다.

상심한 백씨는 전화 한통 걸려오지 않는 사무실에서 소주를 마시며 외로움을 달랬다. 고문 후유증으로 얻은 신병으로 집에 누워 있다가 보름만에 사무실에 나온 어느날. 수북히 쌓인 신문을 뒤적이다 ‘문학모임’이라고 쓰여져 있는 흰 봉투를 발견했다. 2만원이 들어 있었다. 소매치기 당했던 봉투가 돌아온 것.

백씨는 희망을 얻었다. 80년대 말 ‘통일마당집 벽돌 한장쌓기’운동을 벌이던 때처럼 다시한번 사람들의 힘을 모으기로 했다. 당시 통일마당 집은 회수권을 낸 학생, 10원을 기부한 노점상 아줌마 등 전국의 30만명이 참여해 마련할 수 있었던 것.

이번에는 ‘출판 투쟁’. 백씨가 평생동안 강연회를 하면서 느낀 우리민족의 역사와 젊은이들의 가치관에 관한 내용을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출판자금은 1만명으로부터 책 한 권값(5천원)을 후원받는 ‘사전 예매’를 통해 마련할 예정. 현재까지 가수 정태춘씨, 전국철거민연합, 대우계열사 노동조합 등 1백20여명이 참여했다.

‘이렇게 쓰러질 순 없다는 백씨의 의지는 통일마당 집 문 앞에 ‘한 발자욱만 더’라는 벽시에 담겨 있다.

‘한발자욱만 더/한발자욱만 더/밀어내 보다가 죽어도 죽자//한발자욱이 안되면/단 한치 단 한치만 이래도/더 밀어내다가 쓰러져도 쓰러지자//아, 어이타 이놈의 세상은/밀어낼수록 캄캄한 수렁/여기서 주저앉는다는 건/패배보다 더 끔찍한 과거라//밤이사 칭칭 드세지만/한발자욱만 더/한발자욱만 더’ 02―762―0017

〈전승훈기자〉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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