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문열씨 김정일국방위원장에 보내는 편지<전문>]

  • 입력 1999년 1월 17일 20시 17분


《소설가 이문열씨가 북에 있는 아버지를 위해 북한의 김정일국방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동아일보사에 전달했다는 보도(본보 1월16일자 31면)가 나가자 많은 독자들이 그 전문(全文)의 내용을 궁금해 했다. 이씨는 이 편지의 공개여부와 내용및 표현을 놓고 동료 및 후배 문인들과 밤새워 논의했고 김정일국방위원장의 호칭문제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 ‘지도자 동지’로 썼다고 말했다. 북에 있는 부친의 안위를 걱정한 결과라고 사료된다. 다음은 이씨가 김정일국방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 전문.

〈편집자〉》

金正日 지도자동지께.

저는 남한의 소설가 이문열(李文烈)입니다. 저의 성향이나 동태는 북조선 당국에도 비교적 소상히 파악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글을 올리는 것은 남한체제가 생산한 의식을 글로 형상화(形象化)하는 소설가로서가 아니라 ‘지도자동지의 보호아래 있는 한 인민’의 아들로서입니다.

지금부터 49년전에 서른 여섯의 한 젊은 가장(家長)이 만삭의 아내와 어린 4남매, 그리고 늙은 어머니를 ‘적 점령지’에 내버려두고 이상(理想)의 공화국을 찾아 북쪽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젊은이는 여든 다섯의 고령(高齡)이 되어 자신이 떠날 때보다 훨씬 더 나이 먹은 남쪽의 아들에게 안부를 물어왔습니다. 그는 지금 함경북도 이령군 부호리에 거주하는 이원철(李元喆)이고 그의 아들은 바로 저입니다.

마침 인편(人便)이 있어 급작스럽게 쓴 듯한 쪽지같은 안부편지였습니다만 어찌 아버님께서 아시고 싶은 게 단순한 안부였겠습니까. 저는 그 행간(行間)에서 살아생전에 저희를 한번 보고 싶어하시는 아버님의 애절한 심경과 아울러 ‘지도자동지의 인민’으로 자란 낯모르는 아우들을 저희와 이어주시려는 염원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제게는 아버님의 애절한 심경과 염원을 달래드릴 길이 없습니다. 50년이나 남한 체제에 적응하면서 기른 제 의식은 불행히도 사회주의 이상과 일치하지 못했고, 이점 북한 당국에서도 일찍부터 주시하고 있었으리라 봅니다. 따라서 지금 철저하게 선별적으로 이루어지는 방북(訪北)이 제게도 허용되리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사사롭고 은밀한 방법으로 아버님을 만나는 길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감격스럽게도 이 사회 이 체제가 제게 베푼 것은 언제나 제가 바친 것보다 많았습니다. 그런 믿음과 아낌을 받아온 제가 어떻게 떳떳하지 못한 뒷거래로 제 사사로운 감정을 달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외람된 줄 알면서도 ‘지도자 동지’께 직접 글을 올려 배려와 선처를 요청합니다. 어찌보면 이 또한 사사로운 방법일 수 있겠으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있는 형태의 이산이란 고통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이땅에만 남아 있습니다. 잘못이 어느 편에 있든 천만이 넘는 이산가족이 아직까지도 슬픔과 그리움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은 양편 모두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지도자 동지’께서 영단을 내려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신다면 그 사는 곳이 어디이든 그들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올리는 것은 감히 ‘지도자 동지’께 저만의 특전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영단의 한 계기가 되기를 비는 마음에서입니다. 저의 방북이 허용될 뿐만 아니라 저와 같은 고통을 안고 있는 다른 많은 이들에게도 ‘지도자 동지’의 따뜻한 보살핌이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우리 대통령과 정부도 기꺼이 호응하리라 믿습니다.

남한은 한때 왕조시대의 체제 방어수단인 연좌제(連座制)를 채택했습니다. 그 연좌제의 그늘에서 젊은 날을 보낸 탓에 위축된 의식은 통일이나 이산가족 문제에 나를 선뜻 내던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와서 보니 그 또한 자신의 나약함이나 둔감을 변명하는 구실에 지나지않는 것 같아 새삼스레 부끄럽습니다.

1999년 1월 15일 李文烈 올림.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