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그늘과 찬바람 속에 스러져간 우리의 숱한 예인(藝人)들. 이제 그들의 행적은 희미하고 그들이 떠난 뒷자리는 황무(荒蕪)하기까지 하다. 석양녘 쓰러져가는 오두막 생가나마 발견하게 되면 눈물이 다 날 지경이리니….
서울대 미대 김병종교수의 ‘화첩기행’은 이렇듯 너무도 쓸쓸한 우리 근현대 예술가들의 뒤안을 돌아본다. 사그러진 재를 뒤적여 불씨를 다시 지피듯, 침묵의 돌 속에서 풍화해버린 그들의 예술혼을 형형하게 되살려낸다.
예인들의 묘비명을 새로 쓰는 심정으로 절절히 써내려간 글들. 행간마다엔 참으로 무심한 후대(後代)에 대한 회한과 분노가 배어난다. 쑥대머리 가객 임방울을 찾아나선 광산 땅, 저자는 탄식한다.
‘그 명창 임방울의 북은 이제 홀로 울고 있었다. 선풍기만 돌아가는 광산문화원의 빈 사무실 캐비닛 위, 헌 신문지 더미와 박스들 속에서. 한 시대의 심금을 울렸던 임방울의 북은 주인 떠난 뒤 오랜 세월 짐짝처럼 그렇게 놓여 있었던 것이다….’
화가인 저자가 함께 그린 그림은 그저 삽화(揷話)일 수가 없다. 추사(秋史)가 말했던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 그 오랜 문인화의 전통과 정신이 생생히 살아 숨쉰다. 문학의 회화화, 회화의 문학화를 도모해온 저자의 뜨거운 열정과 집념이 느껴진다.
저자는 어쩌면 이 책에서 정작 자기 자신의, ‘또 다른 예술가의 초상’을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효형출판. 9,500원.
〈이기우기자〉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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