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7)

  • 입력 1999년 1월 31일 20시 25분


나는 소나무 언덕에서 바람이 차가워지는 오후 늦게까지 앉아 있었다. 오래 전에 노래 부르던 젊은이들은 산을 내려간 뒤였다. 나도 그때는 벌써 서른이 넘은 나이여서 저들의 쾌활한 활기가 부러웠나보다.

비바람치는 낯선 동네를 지나다 보면 창문 너머로 저녁을 먹으며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의 얼굴이 환한 불빛 아래 보이기도 할테지. 길 가는 자는 흘끗 시선을 던지며 창문 옆 처마 밑을 떠날 것이다. 아니면 먼 밭머리에서 놀러 나간 아이들을 찾는 엄마의 긴 고함소리도 들려올거다. 마당을 내다보며 툇마루에 나란히 앉은 농부 부부의 모습도 먼발치서 보일 것이다. 마누라는 바가지에 풋콩을 따 넣고 남편은 흙 묻은 장화를 벗고 방금 올라 앉았다. 그는 얕은 토담 너머로 상반신만 지나가는 낯선 이쪽 편에 무심한 눈길을 던진다. 개는 시큰둥하니 짖다가 그만두고. 야행열차의 흐릿한 객차 불빛들이 강 위에 걸린 다리 위로 아득한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거기 승강구 쪽 계단에 매달려 휙 지나가는 사내의 검은 실루엣이 보인다. 물처럼 흘러가는 바퀴 사이의 땅에다 담배꽁초를 떨구고는 맞은편 객차의 통행로에 누가 나타났는지 살피면서. 작은 읍내의 인기척 없는 여인숙에 들어서면 문 옆에 수배자의 전단이 붙어있고 흑백 텔레비전은 모든 프로가 끝나 허옇게 바랜 화면에 빛의 점들만 박혀서 직직대고 아낙네는 벽에 기댄 채 잠들어 있다. 군데군데 시커멓게 타버린 비닐 장판 위에 눈부실 정도로 빨간 카시미론 이불이 펼쳐 있고 형광등은 지잉 하는 소리를 내고 있겠지. 숙박부에는 친구들이 구해 준 주민등록증의 번호를 또박또박 적어 넣는다. 밤에 냄새나는 양말은 귀찮아서 그냥 두고 외모는 중요하니까 더러워진 점퍼만 빨아 창문 턱에 넌다. 아침에 길을 떠나려 나서면 생활을 시작하는 세상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채 무심하게 살아가고들 있을 거다.

나는 봉한이가 몇 선을 거쳐서 내게 소개해 준 주소만 믿고 한 선생을 찾아왔고 눈치를 보이면 슬그머니 사라질 작정이었다. 황혼 무렵에 그네가 왔다. 윤희는 터틀 셔츠에 오리털파카를 입고 바지 차림이었다. 근처에서 직장에 나가는 사람 같지 않았고 작은 륙색까지 메고 있어서 오히려 나보다도 여행자처럼 보였다. 윤희가 왔을 때 나는 한옥 여관의 맨 뒤쪽 장작불로 데워진 따스한 내 방에서 잠깐 잠이 들어 있었다. 잠결에도 자박거리는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걸음이 툇마루 앞에 멈추더니 낮은 기침 소리를 냈다. 나는 윤희가 왔다는 걸 걸음소리로 알아들었다. 미닫이 문이 소리없이 빼꼼이 열린다. 나는 누운 채로 이마에 얹었던 팔의 굼치만 살짝 쳐들고 고개를 돌려서 문 틈을 내다보았다.

잠 깨웠나요?

그네는 문을 조금 더 열었지만 들어오지는 않고 마루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나는 게으르게 기지개를 펴면서 일어났다.

짐 가지구 나오세요.

그렇게만 말하고 윤희는 문을 닫았다. 내가 상의를 챙기고 양말 신고 여행 가방을 챙기고 나오니 그네는 여관의 솟을대문 밖에 나가 기다리고 서있었다.

저녁 안드셨죠?

예 점심이 늦어져서….

잘 됐네요. 나는 아주 배가 고파요.

큰 배낭을 질머진 등산객들이 네 다섯씩 무리를 지어 올라왔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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