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씨 출소후 첫 신작시 10편 「창비」誌 발표

  • 입력 1999년 2월 9일 19시 22분


텅빈 밤거리를 날이 밝을 때까지 걸어

낮시간에 잠깐씩 공원 벤치에서 눈붙이고

다시 밤이면 내가 걷는 이유를 너는 모르지

좋았던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는 집을 나와

이렇게 홀로 떠도는 이유를 너는 모르지

밤이면 지하철역이나 보도에 누워 잠들지 않고

따뜻한 노숙자 합숙소를 찾아가 잠들지 않고

밤이면 눈뜨고 걷는 이유를 너는 모르지

나는 이대로 무너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대로 망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내 하나 뿐인 육신과 정신마저

이대로 망가지게 내버려 둘 순 없기 때문이다…

(‘내가 걷는 이유’중)

박노해가 계간 ‘창작과 비평’ 봄호에 신작시 10편을 발표했다. 이번 작품은 지난해 광복절 특사로 석방된 후 시인으로서 그의 첫 ‘귀환보고’. 그간 인터뷰 대중강연 등을 통해 자신의 ‘변화’를 발언하기는 했지만 시로 활자화하기는 처음이다.

신작에 대한 시인 자신의 설명은 “21세기를 바라보며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변화의 대책’을 갖고 대면한 첫 시적 작업”이라는 것. 실직자의 절망, 정권교체 등 정치사회적 현안에서부터 공동체운동이나 신세대예찬에 이르기까지 이번 시들은 ‘시의 몸을 빌은 박노해 사상의 토로’에 다름 아니다.

부당한 권력, 자본과 절박하게 대치하던 ‘노동의 새벽’ 시절의 칼날 선 풍자가 사그라진 대신 ‘인간’ ‘사랑’ ‘공동체’ ‘꿈’ 등의 단어가 두드러진다.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붓는’ 공장노동자에서 ‘미래’를 발견하던 그의 시선은 이제 들판의 젊은 농사꾼에게로 향한다.

‘…흙에서 태어나 다시 흙으로 돌아갈 이 목숨/제 한 몸을 부지런히 써서 이 지상의 식구들/백서른 명을 먹여 살릴 쌀을 거두었습니다…//어느 작가나 예술가도 그릴 수 없는 아름다운 들 그림과/노래와 풍광을 당신의 붓이 되어 보여주었으며/어느 학자나 종교인도 가르칠 수 없는 대자연의 순리와 법과 공동체 삶을 제 농사를 통해 살아 보였습니다’(‘세기말 성자의 기도’중)

박시인은 “거대한 참나무가 도토리열매에서 비롯되듯이 시는 내 모든 활동의 씨앗”이라며 “시 앞에서는 결코 나를 속일 수 없고 시적 응축없이는 강연 산문등 어떤 활동도 힘을 얻지 못한다”고 말했다.

강연 등은 자제하고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고 근황을 밝힌 박시인은 올해안에 감옥에서 다듬어온 수백편의 시중 50∼60편을 가려 ‘노동의 새벽’ ‘참된 시작’을 잇는 제3시집을 발간하겠다고 밝혔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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