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민미술관 2,3층을 모두 사용해 전시된 1백20여점의 작품은 이땅에서 숨쉬며 살아온 우리 조상들의 생각과 숨결은 물론 일민 선생의 우리 문화에 대한 따뜻한 사랑도 충분히 전해주고 있었다. 2층에는 일민 선생이 사용했던 유품과 집무실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40여년간 한점한점 모았다는 수장품은 주로 3층에 전시되어 있다. 3층에 들어가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자마자 눈앞에 우봉 조희룡(又峰 趙熙龍)의 ‘홍백매팔연폭(紅白梅八連幅)’이 펼쳐져 있었다. 이른 봄 잔설을 딛고 이제 막 피어난 붉고 하얀 매화꽃송이가 가지마다 살아 숨쉬고 있었다.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선생의 서화첩이 단아하고 고결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었고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선생의 만년의 인간적인 모습과 학문적인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다산과 유산 정학연(酉山 丁學淵) 부자의 서첩도 눈길을 끌었다.
소치 허련(小痴 許鍊)선생이 남도 농가의 풍경을 그린 ‘전가사시도(田家四時圖)’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고 1백년은 족히 넘었다고 생각되는 ‘책가도팔곡병(冊架圖八曲屛)’의 그 아름다운 색깔은 마치 엊그제 그린 것 같았다.
‘청자운학대나무무늬매병’이 은은한 색깔과 균형잡힌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고 ‘청자상감국화무늬탁잔’은 정교한 솜씨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백설같이 하얀 바탕위에 아로 새긴 ‘매화무늬 백자반상기’도 무척 아름다웠다.
허나 일민 선생 수장품의 가장 큰 특징은 옛 공예품과 민예품에 있는 것 같다. 남녀가 엄격하게 구별되는 생활 공간 속에서 사용된 손때묻은 민예품들이 옛 선비와 여인들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듯했다.
또한 대부분의 수장가들이 고서화나 도자기에만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민예품과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등 근대회화작품에도 큰 애착을 가지고 수집했다는 사실은 일민 선생이 얼마나 우리 미술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했다.
나는 이번 특별전을 보면서 한 개인이 정성을 다해 모은 예술품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줄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조상들이 남긴 훌륭한 문화유산을 보여줌으로써 후대에 커다란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다가오는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고 한다. 지금까지가 기술의 시대였다면 앞으로는 문화의 시대가 된다. 국내외적으로 정치 경제 등 많은 부분이 혼란스럽고 윤리가 망가진 이때 우리나라는 새로운 문화운동을 통해 거듭 태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고 마음의 여유가 없지만 이런 전시회를 보고 나면 한결 여유가 생겨난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소박하게 살고자 노력했던 조상들의 숨결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는 것은 참으로 큰 즐거움이다.
윤돈(보람증권 청담지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