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80돌 특별기획]성격과 의미 재조명

  • 입력 1999년 2월 18일 19시 11분


1919년3월1일 오후 2시. 천도교 기독교 불교를 대표하는 민족대표 33명 중 29명(4명은 불참)은 서울 인사동의 중국집 태화관에 모여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같은 시간, 종로의 탑골공원(당시 파고다공원). 독립선언식을 기다리던 학생과 시민들은 학생대표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가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이렇게 시작된 3·1독립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가 4월말까지 국내와 국외에서 1천5백여차례 시위가 벌어졌다. 참가인원은 2백여만명.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7천5백여명이 사망하고 1만6천여명이 부상했으며 4만7천여명이 체포됐다. 3·1운동의 성격과 관련해 그동안 학계에서는 여러 쟁점들을 놓고 논쟁이 치열했다. 80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연구와 새로운 자료의 발굴로 쟁점들이 어느 정도 정리됐지만 아직 미흡한 점도 있다. 21세기를 앞두고 20세기에 있었던 민족의 중대사건인 3·1운동의 성격과 의미를 재정리하고 이 운동이 민족사와 세계사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 그동안의 쟁점들을 종합적으로 소개한다.

■성공이냐 실패냐

70년대까지만 해도 상당수 학자들은 3·1운동을 실패한 것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를 실패보다는 성공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갖기 시작했다.

3·1운동을 실패로 규정하는 학자들은 이 운동이 지향했던 독립의 성취가 당시 즉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반면 이를 성공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은 당시 시위운동의 목표가 즉각적인 독립쟁취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김진봉(金鎭鳳)충북대교수는 “만세시위를 즉각적인 독립의 쟁취보다는 항일운동의 씨를 뿌린다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용하(愼鏞廈)서울대교수는 “당시 초기조직자들이나 민족대표들은 누구도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한다고 해서 곧바로 독립이 실현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며 “3·1운동을 장기적인 독립운동의 ‘한 단계’로 본다면 성공한 것으로 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상적 배경

60년대까지는 3·1운동의 동기를 당시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외부요인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서면서 외부요인보다는 한국민족 내부에 축적된 독립역량의 발현에 의한 것이라는 자생적 내부요인 쪽으로 대세가 기울었다. 즉 갑신정변 갑오농민운동 애국계몽운동 의병운동 등 초기 개화운동 이후 계속 이어져온 일련의 민족운동으로 독립역량이 축적돼온 결과라는 주장이다. 내부요인 주장론은 다시 기회포착론과 상황론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내부적으로 독립역량을 축적한 한국민족과 독립운동가들이 전술전략의 하나로써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를 기회로 활용했다는 것이 기회포착론의 핵심. 상황론은 당시 조선총독부가 일본으로 쌀을 대량 반출함에 따라 쌀값 폭등으로 인한 생활고에다 유행성 독감으로 14만여명이 사망했고 고종의 죽음으로 국민의 울분이 극도에 달하는 등 당시의 악화된 상황이 독립의지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정은(李廷銀)연구원은 “당시는 성냥을 긋기만 해도 폭발할 정도로 일제에 대한 반감이 극도에 달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누가 주도했나

50년대까지는 독립선언을 한 민족대표 33인을 3·1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60년대 들어서는 민족대표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민중을 주도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일부 진보적 사학자들은 민족대표들을 ‘패배주의자’ ‘투항주의자’로 표현하거나 심지어 ‘독립운동 억제세력’으로 폄훼하기도 했다. 아직도 일부 학자들은 민중을 주도세력으로 고집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민족대표와 민중을 대립관계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경향이 대세를 이뤄가고 있다. 신용하교수는 “초기 조직단계에서 민족대표의 역할이 없었다면 3·1운동의 점화는 없었거나 늦어졌을 것이고 또한 민중의 역할이 없었다면 3·1항쟁이 소규모 운동으로 끝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폭력운동의 타당성

일부 독립운동가와 진보적인 학자들은 3·1운동이 비폭력을 지향했기 때문에 원초적인 한계가 있었고 이로 인해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또 일부 학자들은 도별, 시기별 시위횟수와 투쟁양상을 분석해 3·1운동이 상당히 폭력적인 양상을 띤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사(1968년)는 3·1운동의 폭력성과 비폭력성을 34.5대 65.5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3·1운동은 많은 지방에서 폭력성을 띠기도 했지만 비폭력이 주류였고 또 비폭력이었기 때문에 더욱 차원 높은 운동이 될 수 있었다는 게 오늘날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민족사와 세계사에서의 의미

국내적으로 무단정치를 종식시키고 문화 경제 교육 농민 노동 사회운동 등을 활성화시키는 전기가 됐다. 국외적으로는 민주공화제를 표방하는 상해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독립운동이 한층 조직화되고 무장투쟁이 본격 전개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남녀 노소 지역 종교 신분 계급을 넘어 전민족이 대동단결해 일제에 항거했다는 점에서 한국민족의 통일역량을 보여주는 민족사의 신기원을 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해외로 중국 인도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민족운동에 영향을 끼치는 등 약소민족 해방투쟁의 첫 봉화 구실을 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미도 결코 적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진녕기자〉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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